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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이즐 Mar 25. 2019

노인을 위한 나라는 있다

먼 길을 돌아온 탕아, <라스트 미션(the Mule)>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는 묻따않 보게 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B급 성인 컬트물을 만들겠다고 해도, 스탈우주급 스페이스 오페라를 만들겠다고 해도 따라갈 것이다(그는 <스페이스 카우보이>는 만든 적이 있고,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엄청나게 헤비한 누아르나 진짜 끈적한 LGBT 로맨스를 만들어주어도 좋겠다). 그가 출연하거나 감독한 영화 중 아직까지 못 본 영화는 있지만 안 본 영화는 없다. 젊은 시절 영화는 놓쳤어도, <용서받지 못한 자> 이후 노인이 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만들어낸 영화들은 거의 다 보았다. 그가 주연한 영화와 감독한 영화, 주연과 감독을 겸한 영화 모두 좋아한다. 물론 가장 후자가 제일 좋다. 그의 영화를 보다 보면 단순한 팬심이 아니라 한 길을 육십 년이나 걸어온 그랜드마스터, 장인 중의 장인에 대한 존경심이 생기는데, 자기가 주연한 영화를 편집하는 마음이 어떨까 생각하면서도 영화계의 밥을 육십 년이나 먹었고(그 이상이려나, 지금 약 한 세기를 살아온 사람이 되었으니까) 또 감독도 주연도 오래오래 한 사람이라면 이 정도쯤이야, 라든지 뭐 나쁘지는 않네, 라고 자기 연기를 덤덤하고 냉정하게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건 버려, 하고 아무렇지않게 칼질을 할 듯하다. 진한 연륜과 여유가 묻어나는 그의 영화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동림옹이라는 애칭이 붙는 이유가 있다.



배우로서는 은퇴할 것이며 감독으로서만 활동하겠다고 선언을 했던 터에, 88세가 된 이스트우드가 <라스트 미션(the Mule)>로 감독 겸 주연을 모두 맡겠다고 했을 때 정말 좋았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만이 할 수 있는, 오로지 그이기 때문에 관객들을 빨아당길 수밖에 없는 캐릭터들이 있었다. <그랜 토리노>의 인종차별적 편견을 고스란히 갖고 있는 꼬장꼬장한 공화주의자 역할을 클린트 이스트우드 아닌 다른 배우가 맡았다면 틀림없이 지나치게 극적으로 표현되었거나, 그래서 "저 할배가 갑자기 왜 저러는거야"라는 질문을 듣거나 심지어 "저건 위선자야"라는 빈축을 샀을지도 모른다. 한편 <밀리언 달러 베이비>나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이건 감독이 아니라 주연 역할만 했지만서도)> 에서와 같이 꼰대 기질 다분한 아버지 또는 유사-아버지의 역할을 보면서 고개를 절래절래 젓는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눈물을 뚝뚝 흘리게 할 수 있는 사람도 클린트 이스트우드뿐이다. 그는 그냥 거기에, 그가 만든 영화적 시공간에 공기처럼, 물처럼, 자연스럽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영화적 시공간에 대한 기교랄까 꾸밈도 그의 나이에 비례하는 속도로 줄어든다. 결국 우리의 인생은 모두 드라마가 될 것이라는 진리를 깨달은 노인다운 선택이다.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 <아버지의 깃발> 후로 이 시대와 이 장소, 우리 누구나 지나다니는 동네 골목, 기차역에 카메라를 못박아둔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존재하고, 그 존재 자체가 영화적이다.



결과적으로 올해의 <라스트 미션> 역시 클린트 이스트우드만 만들 수 있는 영화가 되었다. 이 영화의 원제는 'the Mule'인데, 나는 번역 없이 이 원제 그대로 개봉해 주었으면 싶었다. 이건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연기하는 '얼'의 미션에 대한, 작전과 임무와 그 수행에 대한, 비장미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아닌데 제목 덕분에 갑자기 전쟁만세 스타일의 분위기가 묻어나게 되고 말았다(차라리 마지막 임무, 라고 할 것이지 번역인데 영어를 쓴담?). 원제의 의미는 '노새'로서 이 단어는 마약운반책, 또는 고집이 아주 센 사람을 모두 의미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88세의 노인 마약운반책이 검거된 사건에 영감을 받아 영화를 만들었는데, 배우로서는 은퇴하겠노라 선언하였던 것을 뒤집을 만 했기 때문에 이 실화를 가져다가 영화로 만들고 87세의 자신이 직접 연기를 했을 것이다(고백하는데, 지금 둘 중 누가 88세이고 87세인지 조금 헷갈리기 시작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20년생(아닙니다, 30년생입니다)이다).



누구는 이것을 나쁜 아버지, 나쁜 남편의 속죄를 담아낸 영화라고 한다. 백 번 잘못하다가 한 번 용서를 비는 가장은 용서할 수 없지만 클린트 이스트우드 때문에 가능할 것 같다는 말도 있다. 사실 주인공은 나쁜 아버지이자 나쁜 남편이 맞다. 꽃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화훼 비즈니스의 거물이 되었던 주인공 얼 스톤은 딸의 세례식도 결혼식도 나몰라라 하고 꽃 박람회에 참여할 정도의 워커홀릭이다. 그러나 인터넷 비즈니스에 밀린 탓인지 농장은 차압을 당하고 가족들을 찾아가기 민망한 신세가 되었다. 가족 중 유일한 우군인 손녀의 결혼식에 찾아가 문전박대를 당하고, 손녀의 결혼식을 도와주겠다는 약속을 지키려고 마약운반책 일에 발을 담그게 된다. 이 할아버지, 한 번 하면 끝장을 보는 끈기가 있기 때문인지 세자리 단위의 마약을 운반하는 핵심 운반책이 되어버린다. 그가 마약 운반책이 되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이 마약임을 알게 되었으면서도 그 일을 그만두지 않고 계속해서 자동차를 몰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자기보다 새파랗게 어린 놈들에게 총으로 위협을 받기도 하고 경찰에게 검문 아닌 검문을 받기도 하는데, 가족에게 온전히 돌아가기보다 다시 길 위를 떠돌기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이 영화를 만들기로, 게다가 주연까지 하기로 결심하였던 이유와 비슷할 것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 중 명작은 많지만 졸작은 없다. 암만 생각해도 대단한 사람이다(리들리 스콧과 함께,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나에게는 할리우드의 꼬장꼬장한 두 할배이자 명작공장들이다. 게다가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주연한 것들 중에는 범작조차 없다). 가장 최근의 영화 <파리행 오후 3시 15분>은 암스테르담에서 파리로 가는 떼제베에서 일어날 뻔 했던 테러 시도를 담고 있는데, 언제부턴가 실화의 힘에 몰입한 이스트우드는 <체인질링>, <설리>, <인빅터스>, <제이 에드가>  같은 작품들을 줄줄이 만들어냈다. 그런데 <파리행 오후 3시 15분>은 한걸음 더 간다. 마치 다큐멘터리 연극과 같이, 전문 배우들이 출연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인들이 출연을 한다. 실제로 파리행 기차에서 테러범을 저지하였던 세 청년들이 자기 자신이 했던 행동을 재연하는 것이다. 배우들의 연기처럼 자연스럽지 않지만, 다른 의미의 자연스러움이 있다. 다소 경직된 표정으로 대사를 읽으면 어떤가, 어딘가 몸가짐이 엉거주춤해 보이면 어떤가, 화면의 때깔이 곱지 않으면 어떤가. 이것은 그들이 직접 생각했던 것이고 직접 뱉었던 말인데 그 이상의 자연성이 있을까. 게다가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영화적인 편집의 기교도 걷어낸다. 어린아이 시절 세 친구가 어떻게 만났는지, 어떻게 성장해 왔는지, 각자 어떤 생각을 갖고 자라나다가 또 어떤 계기로 유럽여행을 떠나게 되었는지 스냅사진을 이어붙이든 나열할 뿐이다. 그들은 테러범을 잡지만, 위험한 총격전이나 SWAT 투입 장면도 당연히 없다.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일이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이 영화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과 상관도 없기 때문이다. 이스트우드는 그저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 사람들의 뒤에 어떤 생각과 사상과 신념이 자리잡고 있었는지, 그래서 그 사소한 생각과 사상과 신념이 얼마나 큰 힘을 갖게 되었는지를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리라. 이 영화는 추상화 또는 납작납작한 판화에 가깝다. 실제로 그의 영화는 점점 단순해지고 있어서, 오로지 한 영화를 이루는 뼈대만 남기고 나머지 살점은 다 발라내어 버리겠다는 굳은 의지가 느껴질 정도다.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단순하고 파워풀한 추상화로 변해갔던 마티스와 모네를 자꾸 생각하게 된다. 사실주의, 드라마틱한 빛과 어둠, 재현과 묘사는 모두 곁가지이다. 그들의 생각, 컨셉, 무엇이든 전달하고자 하는 알맹이만이 캔버스에 남는다.


<라스트 미션>의 알맹이는 주인공 얼의 얼굴이자 얼의 마음이다. 얼의 정신이다. 얼이 가족에게 회개를 하려 하는 것이 최우선이었다면 보다 번듯하고 깔끔한 일을 해서 돈을 모으지 않았을까, 또는 한 두 번 하고 그만두지 않았을까? 그가 계속 마약운반책 역할을 하는 건 비상식적일 뿐만 아니라 비도덕적이다. 예전 아내와 가족에게 소홀했던 남편 겸 아버지의 모습에서 별로 진보한 게 아니다. 그러나 그는 나이가 들었고, 무슨 일이든 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라고 여길 수 있게 되었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여유와 여지가 생겨, 그의 인내심은 깊어지고 시계는 넓어진다. 젊은 시절과 다름없이 여자들과 놀기도 하고 술을 마시기도 한다. 아이스링크 개축이나 참전군인을 위한 센터 개축에 돈을 쾌척하기도 하는데, 그런 행위가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비추어지기를 원하고 하는 행동이 아니다. 자기 자신의 몸은 여전히 떠돌고 마음은 가족에게 들러붙지 못한 상태에서 어떻게든 자신을 확인하려는 행동, 자신의 행동을 재고하고 재고하고 또 재고하기 위한 행동들이다. 그래서 그의 얼굴은 기쁘고 또 슬프다.


결국 얼은 검거되고 재판을 받는다. 그는 모든 죄를 인정하며 복역생활을 시작한다. 그의 얼굴은 정말 늙고 수척해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모든 모습들을 통틀어 가장 맑아 보인다. 심지어 그가 보다 젊을 때,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을 때보다도 더 맑아 보인다. 행복이나 회개라는 단어와는 어울리지 않는 얼굴인데, 그가 비로소 쉴 곳을 찾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경찰로부터 도망다니는 생활도 그만, 길 위를 떠도는 생활도 그만, 가족들에게 박대당하는 생활도 그만이다. 그는 꽃을 사랑해서 꽃에 인생을 바쳤고, 그런 인생이 잘못되지 않았으며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마약운반책 일을 어떤 죄책감 없이 했다. 문자 그대로 먼 길을 달려 그는 비로소 자신이 가만히 서 있을 수 있는 곳을 되찾았다. 가족과 멀지 않은 곳에서 꽃을 가꿀 수 있다. 한철 피었다 져버리기 때문에 아름답고 특별한 꽃들, 그가 그리 사랑했던 꽃들. 자기의 인생도 언젠가 덧없이 질 것을 이미 알고 있는 노인이 꽃을 보며 웃는 장면에서 이미 얼 스톤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분신이다. 평생 영화를 만들어 온 남자, 이런 영화도 만들고 저런 영화도 만들었으며 이런 말도 듣고 저런 말도 들어봤던 남자가 자신의 인생을 여기 놓아도 괜찮겠노라, 안도하는 것처럼.


먼 길을 돌아온 탕아는 비로소 노인의 특권을 누린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자신의 수많은 고민들을 위해 이런저런 영화를 만들어왔던 것 같고, 실제로 일어난 이야기들에서 그 답을 찾아보려고도 했었다. 아시아 전쟁에서, 어린아이 납치사건에서, 어이없는 비행기 사고에서. 그는 이제 이 영화를 통해 봐, 나도 할 만큼 했지 않아? 라고 장난스럽게 묻는 것 같기도 하고 이제 정말 자신만의 영화를 만들겠노라 새롭게 다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나로서는 동림옹이 자기가 원하는 영화를 계속 만들었으면 좋겠다. 스페이스 오페라든 다큐멘터리든 애니메이션이든 뭐든.  그러니까 제발, 제발, 클린트 이스트우드 연관검색어에 클린트 이스트우드 나이, 클린트 이스트우드 사망(디지털 포렌식으로 색출할 테다) 올라오도록 만드는 사람들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내가 다 잡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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