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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이즐 Apr 20. 2019

세상의 엄마들, 툴리

엄마라는 고난한 직업


샤를리즈 테론과 크리스찬 베일은 참 거침이 없다. 몸무게를 늘렸다 줄이는 건 단지 숫자의 변화만을 의미하는 게 아닌데 ㅡ 여태껏 두 번이나 이십 킬로 마이너스와 이십 킬로 플러스의 반복을 경험한 사람으로서 장담하고 또 확신하는데, 이건 거의 새로 태어나는 것과 다름없는 수준의 변모이자 고통이다. 자아가 튼튼하고 확고한 사람이라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사실 그런 사람이라면 애초에 그리 큰 체중의 변화를 겪을 일은 드물 것이다. 나의 성격은 두 번 변했고 그러한 과정에서 내가 소중하게 갖고 있던 것들을 많이 잃어버렸다 - 다소 둔해지고 유순해지면서 나의 말미잘 같은 촉수들을 잃어버렸다. 내게 어떤 식으로든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들이 있음을 물리적인 방식으로 깨달았다. 입금 전과 입금 후, 라는 말을 아무렇잖게 하지만서도, 암만 그 대가를 받는 직업적 배우라 해도 <바이스>와 <머시니스트>의 과정을 반복한다는 것, <어토믹 블론드>와 <몬스터>를 같은 껍데기 안에 모두 갖는다는 것은 결코 만만하게 넘길 수 있는 일은 아닐 것이다. 나는 그들이 모두, 어느 정도는, 자기학대적 성향이 있는 완벽주의자들일 거라고 확신한다.


 



샤를리즈 테론은 영화 <툴리Tully>에서도 만만찮게 체중을 불렸다. 세 번째 출산을 경험하는 엄마 ‘마를로’를 연기하는데, 확실히 그런 노력 덕에 <그링고>, <아토믹 블론드>, <이온 플럭스>, <매드맥스>의 샤를리즈 테론은 보이지 않으며 화면에는 오직 마를로만이 있다. 그녀가 연기하는 마를로는 그냥 내 엄마 같고 또 주위 누군가의 엄마 같다. 마를로가 처한 상황은 보기 드문 상황이 아니다. 그녀는 출산 휴가에 들어간, 세번째 아이를 막 낳은, 딸과 아들이 하나씩 있는 평범한 엄마다. 마를로의 남편은 아내의 신체적 변화를 비롯하여 “출산”이라는 과정 자체에 무덤덤해진 것 같다. 남편으로서 가끔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아이들을 챙겨주는 것만이 육아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도 잘 모르는 듯 하다. 이건 남편이 나쁜 남자라서가 결코 아니라,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한 여성이 이십 내지 삼십 킬로의 몸무게 변화를 겪게 된다는 것, 그 격렬한 변화를 경험한 몸은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는 움직이지 않게 되며 심지어 아이를 몸 밖으로 내보낸 후에도 지속적인 변화를 겪어야만 한다는 것을 글로 읽어서는 잘 알 수 없다. 여자의 신체를 가졌으며 이미 출산을 경험했거나 앞으로 출산을 경험할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슬프리만큼 독점적이고 배타적인 무언가인 것이다. 마를로는 착유기를 이용해 젖을 짜내야 하고,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주었다가 또 데려와야 하고, 무거운 몸을 움직여 저녁식사 준비를 해야 하고, 세 번째라 해도 결코 익숙하지 않은 무게를 벗어내기 위해 운동도 해야 한다. 엄마로서, 여자로서, 한 사람으로서 가져왔던 정체성이 다시 변화한다. 새삼 장담하는데, 비록 나는 출산을 경험하지 않았으며 어쩌면 출산의 기회를 이미 잃었을지 모름에도 불구하고 단지 몸무게 전체의 오십 퍼센트에 달하는 수준의 변화를 두 번 경험했다는 점에서- 생각해 보니 “증량의 시절”, 즉 이십 킬로그램대가 사십 킬로그램대로 올라오는 시절에는 백 퍼센트의 변화가 필요했다 - 그러한 변화는 자아가 접시처럼 산산히 깨어지는 과정의 동의어나 다를 바 없다. 내 고유의 것이라고 믿었던 정체성은 부서졌다. 나는 그 옛 조각들과 새로 얻은 조각들을 얼기설기 이어붙였다.





마를로가 겪는 고난한 과정이 결코 만만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나와 내 주변의 사람들이 체중 변화의 과정을 기억하는 것은 어쩌면 그 변화의 이유가 출산이 아니었기 때문, 즉 단지 그 “특이성” 때문인지도 모른다), 마를로의 짐이 다른 가족들에게 분배되지 않는 이유는 명백하다. 다른 여자들도 그런 변화를 “대개”, “통상적으로” 겪으므로 마를로는 고통의 특별함과 유별남을 주장할 수 없다. 모든 것을 내팽겨치고 도망갈 수 없다. 다른 엄마들처럼 그녀도 아이들을 챙기고 남편을 챙겨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게 요구되고 또 받아들여진다. 다른 사람들은 "보모를 불러", "도우미를 고용해"라고 아무렇잖게 말한다, 마치 그 고통이 케이크나 피자처럼 쉽게 나누어질 수 있다는 듯이.




그렇게 마를로는 밤에 아이를 봐주는 "심야 돌보미"인 툴리와 만나게 된다. 툴리는 메리 포핀스만큼 엉뚱하고 정직하며 독특하다 - 야간 보모를 부르기로 했다면서, 라고 대수롭지 않게 물어보는 남편에게 마를로는 "좀 특이해", 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바로 그런 특이한 점이 마를로의 마음을 건드린다. 나는 아기뿐만 아니라 당신도 함께 돌봐주러 왔는걸요. 아기에게 잘 자라고 인사해 주세요, 밤 사이 아기는 또 자라 있을 테니까요. 툴리의 투명하고 따뜻한 말들에 마를로는 조금씩 활기를 되찾는다. 어떻게 20대인 당신이 나보다 더 똑똑하죠? 라고 마를로가 묻자 툴리는 어깨를 으쓱하며 20대니까 생각할 시간이 많잖아요, 라고 대답한다. 이런 툴리 덕에 마를로는 가족들을 위해 로스트 치킨을 만들고, 전학을 가야 하는 아들의 손을 붙잡아주고, 매일 화장도 조금씩 하기 시작한다. 




영화가 만약 여기서 끝난다고 해도 나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쩄든 엄마가 된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하게 해 주고, 그냥 아이를 출산하는 데에서 "엄마 되기"가 끝나지 않음을 보여주니까 .그러나 만약 보모를 고용할 여유가 없는 엄마라면? 신경 과민과 우울의 상태를 도저히 혼자 힘으로 벗어날 수 없는 엄마라면? 엄마 되기의 고통은 과연 애초에 분배가능한 것이며, 누군가의 도움을 통해서만 이겨낼 수 있는 것일까 - 아니, 애초에, 그 고통을 이겨내는 것이 물리적으로 가능한 일일까. 어느날 갑자기 툴리는 마를로에게 "이별"을 통보한다. 더 이상 마를로와 아이들을 돌보아줄 수 없다고, 마치 바람을 타고 제멋대로 았다가 또 떠나간 메리 포핀스처럼. 마를로와 툴리는 마지막으로 같이 술을 마시러 나가고, 음주운전으로 교통사고를 내고 만다. 침대에 누워있는 부인 마를로를 보며 남편은 머리를 갸우뚱한다. 요즘처럼 마를로가 좋아 보인 적이 없었어요, 좀 이상하긴 했지만 편안해 보였는데 그녀가 과로에 수면 부족 상태였다니 믿을 수가 없어요. 수상쩍은 표정을 짓는 간호사에게 남편은 마를로의 결혼 전 이름이 "툴리, TULLY예요"라고 말한다.  어쩌면 마를로의 예전, 또 어쩌면 마를로의 이후, 마를로가 갖고 있던 부분들 중 일부가 떨어져나와 영영 사라져 버릴까 두려웠던 마를로의 분신인 '툴리'는 그렇게 엄마가 된 자기 자신을 위로한 후 떠나간다.




완벽한 엄마까지는 아니라도 남들 보기에 부럽지 않은 엄마 - 남편에게 제때 맛있는 식사를 차려주고 딸과 아들의 학교 행사에 참석하며 활기찬 모습을 보여주는 엄마가 되고 싶었던 마를로/툴리에게, 누구도 그렇게까지 애 쓸 필요 없어요, 또는 그저 지금 원하는 대로만 움직이면 돼요, 또는 (심지어) 졸릴 땐 자고 피곤하면 꼼짝도 하지 말아요, 라고 말해주지 않았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엄마 되기"의 과정을 거치든 그 절대적인 수 또는 보편성/평범성/일상성에 상관없이, 그 과정의 지난함과 고통은 그저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열 달 동안 지금까지의 내가 아닌 존재로 변해가며 그 끝을 기다리다가, 열 달이 지난 후에도 이전으로는 두 번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의 공포 역시 어디로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영화  <툴리>는 어머니의 위대함이나 모성신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 이런 어머니들을 이해해 달라고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엄마들이 겪어내는 "엄마 되기"에 대해 좀만 더 생각해 달라고, 엄마라는 단어 또는 직업이 요구하는 수없이 많은 일들을 부디 외면하고 좌시하지 말라고, 샤를리즈 테론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샤를리즈 테론의 체현을 통해 이야기한다. 결국 <툴리>는 세상의 아주 평범하고 평범한 엄마들 모두에 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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