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싫은 연애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헤이즐 Apr 21. 2019

나쁜 사랑

나쁜 관계에 빠졌음을 확신하는 순간




모든 일의 원인을 나에게서 찾는 것은 비단 그와의 관계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나 자신이 “양철 심장을 가진 소년”이라도 되는 것처럼 분해하고 뜯어보는 데에 매우 익숙한 사람인 것이다. 많은 병들, 그들 중 대부분은 깁스나 붕대나 흉터의 형태로 눈에 띄지 않는 병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익힌 습관인지 아니면 내 자신에 대해 유난히 분석적이고 자학적으로 굴게 되는 천성을 갖고 태어난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이런 경우에도 나는 늘 확률과 가능성의 문제로서 문장을 쓰고 생각을 한다. 문장과 언어가 생각을 반영한다는 것을 떠올리면 너무나 당연한 결과다. 내가 가장 즐겨 쓰는 문장이 있다면 “either something or something, 이것이 아니라면 저것, however that therefore this” 따위의 선택과 인과를 품고 있는 문장이 아닐까 한다. 아주 작은 가능성까지 따져가면서 여러 가지에 대해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내가 이런 말을 잘못 했기 때문에, 또는 저런 행동을 잘못 했기 때문에 지금 이런 난처한 상황에 있다고 고민한다.



그러나 나는 그와 함께 있을 때 유난히 이런 것들을 철저하게 따지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결정적으로, 그와 함께 있을 때, 아주 많은 순간, 시간, 분과 초와 시 동안에 그리 행복하지 않고 때로는 많이 우울하다. 서글프다. 죄책감을 느끼기 때문에 서글프고 그냥 그 자체로 외롭다. 같이 고기집에 가서 숯불 앞에 앉아있다가도 외롭고, 같이 집에서 저녁에 술을 마시다가도 외롭고, 영화관에 앉아 영화를 보는 때에도 외로우며 차를 타고 어디론가 가거나 돌아올 때에도 외롭고 텔레비전 야구중계를 보면서 핸드폰을 만질 때에도 외롭다. 언젠가 핸드폰 때문에 서로 기분이 상했던 적이 있다. 여행지에서였다. 핸드폰으로 예약할 수 있는 가게를 찾아보는 나에게 그는 난 식사할 때 핸드폰 보는 사람이 제일 별로더라, 라고 짜증을 냈다. 그는 같이 저녁을 먹으러 간 식당에서 야구 중계를 틀어주지 읺으면 핸드폰으로 중계를 틀어놓고 몰두하며 밥을 먹는 습관이 있었고 내가 한창 다음에 무엇을 말할지 생각하면서 이 이야기 저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도 그의 수많은 다른 친구들과 메시지를 주고받는다. 내가 그런 이야기들을 굳이 그 자리에서 끄집어낼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내 얼굴만큼은 평소처럼 기분을 감추지 못했기 때문인지 그는 아침부터 그런 얼굴 하지 마, 짜증나니까(그러고보면 짜증나, 라는 말도 그가 즐겨 쓰는 단어 중 하나이다), 라고 말했다. 나는 아주 깊이 깊이깊이 가라앉았다.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내가 기분이 상하거나 “불만이 있을 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다음날 집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탔을 때에는 둘다 많이 언짢아지고 날카로워진 상태였다. 그는 이제 한국 돌아가면 나 안 만나려고 이러냐? 라고 말했다. 얼마 전에도 그는 나에게 불만쟁이, 매일 불만만 많지, 라고 말했다. 그는 억울하겠지만 나는 기억력이 지나치게 좋은 편이다. 그가 나에게 멋대로 했던 말들, 그러나 그는 이제 저편으로 흘려버렸을 말들을 나는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는다. 절대로 잃어버리지 않는다.



그가 함부로 말할 때 나는 깊은 상처를 받지만, 사실 만약 내가 아, 그냥 그는 그런 성격을 가진 사람이구나, 라고 생각하고 넘겨버릴 수 있었다면 별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는 정말 그냥 경솔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어서 별 뜻 없이 온갖 말들을 하고 내 자존심과 자존감을 다치게 만들고 나를 외롭게 만듦에도 불구하고 진심으로서는 그런 게 아니라고, 스스로도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이것 역시 가능성의 문제이다. 그리고 이제 나는 이 가능성이 아주 희박하고 희미하다는 것을 안다. 화성의 산소 농도만큼 옅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여태껏 나는 많은 사람들이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고 그 짐작은 대부분 옳았다. 확률의 게임에서 나는 늘 우위였다.  그러나 그에 대해서 내가 희망하는 것, 예컨대 그가 조금은 미안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또는 조금은 안타깝게 생각하지 않을까, 라고 기대하는 것은 그저 나의 기대에 그친다. 반면 제발 그가 이렇게는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라도 바라는 것은 어김없이 딱 들어맞는다. 예컨대 그는 내가 우는 것을 싫어하고, 네가 울면 짜증이 나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라고 말한다. 남자들은 여자가 울면 미안해하기보다 짜증을 느낀다지만 그러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라고 예전부터 생각했었던 나의 가능성은 완패했다.



그래서 나는 자학적이고 자멸적이며 자기 소모적인 생각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결국에 그는 내 외로움을 이해하지못할 것이다. 엄살이라고, 예민하다고, 지나치다고, 짜증스럽다고, 철이 없다고, 어리다고, 너무나 어리다고, 어리고 어리석다고 생각하고 말 것이다. 그렇게 넘길 것이다. 나는 그가 나에게 마음대로, 정말이지 생각나는 대로 말하는 바로 그 순간보다도 그 순간을 곱씹고 또 곱씹는 내 자신을 보면서 내가 잘못된 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뼈아프게 확신한다. 그는 한 마디 하고 잊어버릴 것을 나는 두고두고 기억하면서 내 자신을 마모시키는데, 이것이 과연 버티면서 유지할 만한 관계인가. 이것은 나의 잘못인가, 그의 잘못인가, 누구의 잘못도 아닌 차이 때문인가, 오히려 그래서 어떤 해결책도 없는 것이며 그저 나는 돌이 닳듯이 닳아 없어지다가 어느 한순간에는 내가 늘 그래왔듯이 도망치는 수밖에 없을 것인가. 나는 그의 문자를 보면서도 도망치는 것을 생각한다. 당신은 모를거야, 내가 어디까지 어떻게 달아났었고 또 어디까지 도망칠 수 있는지 전혀 짐작도 못 할 거야. 그러니까 그때까진 조금만 더 버틸 거야. 이렇게 버티는 것은 애정이 아니라 오기가 아닐까, 나쁜 집착과 나쁜 연애와 나쁜 관계가 아닐까. 그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다.


 



매거진의 이전글 당신이 내게 원하는 게 뭐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