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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이즐 Mar 26. 2017

순결한 드레스에 맹세

돌아오지 않는 순간, <행잉록에서의 소풍>


행잉록에서의 소풍은 호주가 배경인 영화인데, <해변의 카프카>를 연상시키는 구석이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 속 어느 에피소드는 여교사와 학생들이 산에서 기절한 후 그 당시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상황을 묘사하는데, 그 미스테리한 상황 속 분명 그들에게 어떤 위해가 가해졌음을 암시한다. 학생 중 하나는 제대로 생각하는 법을 잃어버렸고, 여교사는 성적으로 상처받는다. 행잉록에서의 소풍은 오스트레일리아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오스트레일리아의 독특한 풍광이 매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사람이 함부로 접근할 수 없을 것처럼 붉고 거칠고 황량한 대지는 여학생들과 동등한 비중을 차지한다.


여학생들은 성 발렌타인 데이에 행잉록으로 소풍을 갔다가 단체로 기절해버린다. 그들 중 몇몇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고, 돌아온 학생들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경찰의 수사나 그들과 마주친 남자들의 기억은 아마도 여학생들이 어떤 정신적, 신체적 피해를 입었음을 암시한다. 성적인 순결함, 정신적인 순결함, 또는 당시 여학생들이 갖고 있던 어떤 중요한 것을 행잉록에서 빼앗겨버린 것이다. 마치 사람의 출입을 허락하지 않는 행잉록이 여학생들에 의해 침범당했듯, 여학생들은 그들 스스로가 생각하는 "여학생다움"을 잃어버린다.



꼭 그 상실을 부정적인 것으로 생각할 것만은 아니다. 여학생들이 살고 있는 환경은 상당히 제한적인 것이었다. 학교는 학생들의 호기심을 억누르고 순수함을 강제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 청소년의 자아는 그런 사슬을 견디지 못하고 폭발하기 마련이며, 여학생들과 여교사들로 이루어진 공동체는 언제나 그런 위태로움을 품을 수밖에 없는 상태였다. 학생들의 충동, 갈망, 탈출, 성장, 어떤 단어를 붙여도 그럴듯하게 설명될 수 있는 상황은 반드시 닥치게 된다. 시간이 흐르는 것을 멈출 수는 없고, 학생들을 순수하고 순결한 상태 그대로 냉동시켜버릴 수도 없다. 중요한 것은 아무리 그 순간이 아름답고 귀중한 것이든 상관없이, 반드시 그 순간은 지나가버린다는 것이다.



성 발렌타인 데이에 학생들이 갖춰입은 옷은 마치 꿈결처럼 아름답다. 아이들은 모두 잘 꾸며진 도자기인형 같다. 한 줌 허리에 리본을 감고 조그만 손에 장갑을 낀 소녀, 흰색의 나풀나풀하고 투명한 날개를 두른 소녀들이 달려간다. 햇빛은 옷자락을 투과하며 빛난다. 금방 찢어질 듯, 더러워질 듯 새하얀 옷을 굳이 소풍날 입은 이유는 무엇일까. 여학생들과 행잉록의 부서지기 쉬운 상태를 대변하는 드레스는 몇 번을 봐도 몹시 슬프다. 현실의 말을 배우기 전 소설 속 말을 먼저 배우고, 현실의 사랑을 배우기 전 소설 속 사랑을 먼저 꿈꾼다. 싱그러운 옷을 입은 봄 처녀들은 그 순간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줄은 꿈에도 모른다. 청춘, 순수, 맹목, 열정, 무엇이라고 불러도 상관없을 그때가 눈 깜빡할 사이에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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