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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이즐 May 08. 2017

연애의 복사판, 몽 루아

내 세상의 골칫덩이, 내 세상의 왕에게

세상에서 가장 멋있는 남자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 뱅상 카셀이 나온 이 영화를 하루에만 네 번 넘게 본 적 있다. 뱅상 카셀 때문은 아니다. 연차를 쓰고 침대에 드러누워 계속 돌려봤다. 한 여자가 스키장에서 심한 부상을 당하고, 재활원에서 치료를 받는 동시에 옛날을 회상하는 얘기다. 여주인공 ‘토니’로 분한 엠마누엘 베르코는 이 영화로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았는데 혹여 더 권위 있는 상이 있다면 응당 그를 받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십자인대를 다친 여자가 무릎을 움직이며 한 걸음씩 내딛으려 할 때마다 비명이 나온다. 그녀의 고통은 어떤 남자가 그녀에게 주었던, 지금도 주고 있는, 앞으로도 줄 고통과 다르지 않다.



클럽에서 만나 사랑에 빠진 후 아이를 낳았지만 이혼을 했는데 여전히 지금도 서로 만나고 있다, 는 문장으로 정리할 수도 있다. 그러나 토니의 과거 - 토니와 조르주의 과거는 만만하게 생각할 만한 것이 아니다. 조르주 때문에 토니는 창문을 맨주먹으로 깨뜨린 적도 있고 증조할머니가 물려준 가구를 차압당한 적도 있다. 물론 아무도 없는 주방에서 섹스한 적도 있고 초음파사진을 보며 행복해한 적도 있다. 롤러코스터도 이런 롤러코스터가 없다. 결국 토니는 선언한다. “그냥 사랑 안 하고 아프지 않겠어”라는 말은 허세도 과장도 아니다. 나도 그런 연애를 했다. 가끔은 남자친구의 집 창문을 주먹으로 쾅 깨뜨리고 싶다. 더 예전 같았으면 틀림없이 정말로 그렇게 했을 것이지만 그는 모른다, 영화 이천 편을 보기 시작하기 전의 내가 얼마나 박력 넘치는 미치광이였는지. 차라리 토니처럼 물리적으로 화를 내는 편이 낫지 않나 싶을 때가 많다. 사랑은 십자인대뿐만 아니라 자존감도 파괴한다.



토니가 조르주를 향해 뱉는 말은 소설이나 영화를 위해 만들어진 대사라기보다는 그냥 한 인간으로서 내뱉는 진심 자체다. 사람을 힘들게 하는 것은 사랑받지 못한다는 백 퍼센트의 사실이 아니라 사랑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오십 퍼센트의 불확실함인데, 조르주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 같다. 당장 내일을 예측하지 못하는 인생에서 하나의 지푸라기나마 찾으려고 연애를 하고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함께 늙어가려는 것인데 조르주는 첫 만남에서부터 토니를 멋대로 뒤흔든다. "나를 기억해요?"라는 물음에 "안 나는데요"라고 퇴짜를 놓을 땐 언제고 굳이 클럽에서 따라나와 "이제 기억나네요"라며 핸드폰을 던졌던 남자다. "모델들하고만 사귀었어?"라는 질문에 "당신이 평범하다고 생각해?"라고 사랑 고백을 하더니, 옛 애인의 자살 기도에 그녀를 돌봐줘야 한다며 이사 계획을 밝히는 남자다. 아이를 낳아달라더니 다른 여자와 같은 침대에 누워 있고, 마약을 해서 기억이 안 난다며 징징거리다가 아이를 보게 해 주지 않으면 양육권을 뺏아버리겠다고 협박한다. 토니는 결국 "난 그냥 평범한 삶을 원해"라고 말하며 울음을 터뜨린다. 한때는 그녀 세상의 왕이었던 남자가 얼마나 부족하고 하잘것없는 존재에 불과한지를 인정한다. 그리고 이혼한 후에 기껏 좀 편안하게 살 수 있나 싶더니, 여전히 그를 가질 수도 버릴 수도 없는 자신을 인정한다.



가질 수도 버릴 수도 없는 존재인 조르주는 내가 만난 사람과 행동거지가 붕어빵 같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그 앞에서 나는 엄청난 무력감을 느꼈다. 어리고 어리석은 바보가 된 것 같은데, 이미 나보다 더 많은 곳에 가 보았고 더 많은 “모델 같은 사람들”을 만나본 그는 비계획적이고 충동적이기까지 했다. 술에 취했을 때 뱉는 말도 절대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아무리 진심을 다해 대답해 주어도 “취해서 생각이 안 난다”는 말로 상대를 바보로 만들어 버린다는 것도 배워야 했다. 더 이상 이렇게 지낼 수는 없잖아, 라는 말이 매일 턱끝까지 차오름에도 어쩌다 내가 그에게 의지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해 버렸다. 나한테 왜 이래, 라고 따지고 싶어도 끝낼 수가 없는 것이다. 토니가 어느 날에는 조르주를 사랑하고 다른 날에는 그를 미워하고 그러다 한 아이를 나아 소년이 되는 동안 그 과정을 지긋지긋하게 반복하듯이, 사람 모양새가 크게 다르지 않다.



게다가 영화를 몇 번 보고 나니 조르주의 눈으로도 보인다. 멀쩡한 허우대와 말솜씨로 예쁜 여자를 백 명도 꼬실 수 있지만 결국 불안정한 마약 중독자에 불과한 남자가 똑똑하고 독특한 여자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사랑이 식을 수도 있고 다시 타오를 수도 있다는 걸 여자가 알아주지 않는다. 좀 더 차분하게 기다려 주면 좋겠는데 기다려주지 않는다. 닦달하지 않으면, 몰아붙이지 않으면 좋겠는데 자꾸만 자신을 나쁜 사람으로 만든다. 조르주와 토니 모두 철없고 외로워서 서로가 필요했지만, 서로가 완벽하지 않은 존재라는 데 지쳐간다. 그런 식으로 두 사람 나름의 영원이 만들어진다. 아마도 두 사람은 계속해 만날 것이고 다툴 것이고 같이 잘 것이고 일어날 것이다. 결코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다(Happily ever after)”는 아니지만, 또다른 형태의 “불멸성(Eternity)”이라는 데에 다소 서글픈 위안이 있다. 



분명 한때는 내 세상의 왕이었고 신이었던 다른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와 이렇게 힘든 연애를 할 줄도 몰랐다. 만나는 게 힘들어, 라고 대답하면 화를 내는 남자, 애초에 사랑이 변하지 않을 수는 없다고 역설하는 남자에게 나는 어떤 기대를 할 수 있단 말인가. 과연 어떤 형태로든 안정적인, 일상적인, 영원의, 불멸한 결과를 생각할 수 있을지 전혀 알 수 없다. 비관적이다. 차라리 사랑 안 하고 안 아플래, 라는 말은 역시나 치기도 과장도 아니다. 토니는 마침내 재활원에서 걸어나오고, 조르주와의 인연은 끝나지 않는다. 허나 내가 토니처럼 어디를 다쳐서 치료를 받아야만 비로소 모든 걸 다시 생각할 수 있다면, 앞으로 어떻게 될지 짐작이나마 할 수 있다면 난 이미 십자인대를 다친 적이 있으니 좀 봐 달라고 말하고 싶다. 손목의 관절염으로는 안 되겠니,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니, 비록 조르주와 토니와 너와 나를 포함해 세상의 그 누구도 알 수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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