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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이즐 May 11. 2017

늦었다고 생각할 때는 정말, 단지 세상의 끝

노력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딴 얘기지만, 감독 겸 배우인 자비에 돌란에 대한 감정은 양가적이다. 젊고 다재다능한 청년이 실제로 자기 재능을 물체화하여 내어놓는 것을 보면, 저절로 본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를 좋아하고 - 과격할 정도로 좋아하고, 글을 쓰고 싶고, 카메라를 들고 싶고, 춤을 추고 싶고, 카메라 앞에 서고 싶고, 무엇보다도, 이야기를 하고 싶다. 말에 서툰 만큼 다른 형태로 내 안의 어떤 것을 끄집어내어 전달하고 싶다. 자비에 돌란은 그런 이야기에 능하다. <아이 킬드 마이 마더>를 만들 때부터, 발칙한 <하트비트>와 사랑스러운 <마미>를 만들어낼 때부터 그랬다. 필요할 때는 직접 카메라 앞에 섰고 망설임 없이 어떤 음악과 색깔이든 가져다 썼다. 자비에 돌란의 <단지 세상의 끝>은 그가 이전까지 만들어 오던 영화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이게 칸느에서 심사위원과 관객 간 싸움을 부추겼다는 게 문제가 됐다. 안 그래도 친절하고 겸손한 애티튜드와는 거리가 먼 청년의 인터뷰들은 산만한 감이 있는 작품들에 대한 반감을 덩달아 부추긴 경향이 있었다. 거기다 예전의 작품보다 결코 더 낫지 않은 - <마미>라든지 <로렌스 애니웨이>에 비하면 시각적으로든 청각적으로든 빈곤하기 그지없는 - <단지 세상의 끝>이 칸느의 영광을 차지할 수 있는지 갑론을박이 심했다. 모든 영화의 가치는 관객이 결정한다고 믿는 사람으로써 <단지 세상의 끝>보다 더 좋은 작품으로 좋은 결과를 얻을 수도 있는 감독이 그러지 않았다는 데 아쉬움을 느끼며, 결론적으로 이 영화는 평범하고 밋밋한 범작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영화를 이끌고 가는 것은 화려한 영상이나 음악도 아니고, 뱅상 카셀과 레아 세이두 등이 총출동해 보여주는 연기력도 아니다. 여러 번 보고 싶은 영화는 아닐지언정 <단지 세상의 끝>에 내 스스로를 겹쳐 글을 쓰는 이유로 돌아오면, 비록 단단하게 짜여진 각본은 아닐지언정 바로 이 스토리가 영화를 순수하게 책임지고 있다. 루이(가스파르 울리엘)는 자신의 인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고백하기 위해 가족에게로 온다. 그러나 12년만에 돌아온 집은 낯설고, 엽서 대신 목소리로 말을 하려니 더더욱 쉽지 않다. 대체 집까지 오는 데 왜 이리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 눈물을 터뜨리는 어머니에게 루이는 "여기가 세상의 끝도 아닌데 자주 올게요"라고 탄식하듯 말한다. 그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가 마음속으로 얼마나 가족을 사랑하든, 고향을 그리워하든, 예전의 흔적을되짚고 싶어하든 상관없이 그의 마음은 충분히 전달되지 못했다. 그는 더 노력했어야 했다. 더 많이 찾아오고 전화하고 다정한 엽서를 보냈어야 했다. 자신과 가족들 사이에 메울 수 없는 틈이 생겨나기 전에, 세상의 양쪽 끝보다 더 멀어지기 전에, 단지 가족이라고 덮어두지 말고 다른 사람들에게처럼 시간과 마음을 기울였어야 했다. 



타지 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알게 된다. 돌아갈 곳은 가족, 쉴 곳은 내 집뿐이라는 말이 세상 모든 사람과 모든 상황에 적용되는 말은 아니다. 어쩌다 어린 나이부터 집에서 떨어져 살 일이 많았다. 집에 가면 언제나 같이 밥을 먹는 “식구”보다는 어쩌다 집에 오는 “손님” 대접을 받았다. 집에서 내 옷이, 가구가, 방이 없어지는 과정은 대지의 침식처럼 느리고 확실하게 일어난다. 가족에게 할 수 없는 이야기가 늘어나고, 집에 가도 다시 엉덩이를 떼고 일어날 때를 생각한다. 서글픈 일이다. 왜냐면 나는 가족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가족을 사랑하지만 같이 있는 것이 점차 버거워지고, 이런 말을 하면 상처입지 않을까 걱정하게 되고, 내 침대가 없다는 것에 불편과 불만을 느끼고, 결국 하려고 했던 말은 하지 못하고 점차 집에 가는 일과 전화를 거는 일을 줄이게 되기 때문이다. 



가장 가깝다고 믿고 싶은, 그러나 사실 단지 나와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가는 별개의 생명체 중 몇몇에 불과한 존재, 서로가 노력하지 않으면 오히려 가족이라는 이유로 더 서운함을 느끼고 원망하고 미워하게 되는 사람들. 만약 루이가 앙투안(뱅상 카셀)의 동생이 아니었더라면 앙투안이 루이에게 독한 말을 하면서 분노를 쏟아낼 이유가 있을까. 동생이기 때문에, 가족이기 때문에 앙투안은 자유롭게 사는 루이를 질투하고, 찾아오지 않는 루이를 원망하는 것이다. 세상의 끝도 아닌데 왜 자주 오지 않았지, 라고 멱살을 잡고 싶은 것이다. 어느덧 기억 속 모습과는 너무나 달라져 버린 여동생, 형이 결혼한 후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하는 형수를 보며 루이는 앙투안을 이해하고, 후회한다. “더 자주 올게요”라고 말하지만 과연 그에게 더 자주 올 수 있는 시간이 올까, 가족과 자신 사이의 구덩이를 메울 만큼 여유가 주어질까. 늦었다고 생각한 때가 정말 너무 늦은 것은 아닐까.



극렬하게 말하면, 이 영화에서 루이의 시한부 선고는 단지 루이가 가족과의 거리를 실감하고 자신의 잘못을 후회하게 되는 계기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루이가 아프지 않았더라면 그는 계속해서 고향에 “세 단어짜리” 엽서만 보냈을 테고, 어쩌다 전화나 걸었을 테고, 가족의 원망을 모른 체 했을 것이다. 그러나 가족은 거기 영원히 있는 것이 아니다. 나만을 기다려주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다. 나의 엄마와 아빠, 동생에게는 각자 살아가야 할 삶이 있고 그만큼 견뎌야 할 고통이 있다. 분명 뭔가를 고쳐야 하는데, 돌이킬 수 있다면 돌이키고 싶은데, 더 잘 하고 싶은데, 어렸을 때 다짐한 만큼은 아니더라도 그들이 나의 가족임을 언제나 생각하며 애쓰고 싶은데, 나 하나를 제대로 감당하고 건사하는 것조차 이토록 힘들다는 생각에 늘 미루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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