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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이즐 Jun 02. 2017

이상한 재미, 오만과 편견 그리고 좀비

캐릭터는 변하고 해피엔딩은 영원하다

이야기형 영화와 볼거리형 영화가 있다면, 동영상형 영화와 스냅샷형 영화가 있다면 <오만과 편견 그리고 좀비(Pride and Prejudice and Zombies (2016)>는 단연 후자에 들어갈 것이다. 일응 어불성설로 들리는 후자의 영화는 또 그 나름대로 존재의 의미가 있다. '영화'라는 단어(또는 장르) 자체가 내포하고 있는 플롯, 스토리텔링, 줄거리 등 서사의 즐거움을 뒤로 한 영화다. 그런 재미를 자발적으로 포기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획득에 실패한 영화일 수도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서사에 충실하다면 소노 시온은 볼거리에 충실하다. 라스 폰 트리에의 <멜랑콜리아>는 볼거리형 영화인 반면 <도그빌>은 이야기형 영화다. 조 라이트의 <오만과 편견>은 볼거리에도 충실한 이야기형 영화인데, <좀비>는 이야기에 더 신경썼으면 좋았을 듯한 볼거리형 영화가 되었다. 한마디로, 좀 지루하다.



<좀비>는 제인 오스틴의 원작에 의지하는 수많은 영상작품 중 하나(물론 별도의 원작소설이 있다)임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자기차별화를 할 수 있는 부분이 있었다. 제인 오스틴 시대에 영국이 좀비들에게 습격당한다. 송장 파리들이 인간 코스프레를 한 좀비를 찾아낸다. 귀족의 딸들이 소림사로 유학을 가 무술을 배운다. 발칙한 만큼 그럴듯하다.  <월드 워 Z>나 <레지던트 이블> 같은 좀비 영화들처럼 재빠른 속도로 관객을 몰아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좀비>는 아쉽게도 서사적 재미를 획득하는 데에 실패한다. 촘촘하지 못한 연출이 개연성을 빼앗아간다. 입체적으로 살아날 수 있는 인물을 무참히 짓눌러 버린다.


그러나 <좀비>를 아예 볼 필요도 없는 영화로 매도하기엔 아쉬운 부분이 있다. 가장 최근의 “제인 오스틴적” 범작이었던 <레이디 수잔>에서도 18세기 의상과 소품이 주는 즐거움만큼은 상당했다. <좀비>의 청년들이 입고 있는 복식도 아름다운데, 거기다가 좀비퇴치용 무기가 더해지니 색다른 매력이 있다 -  <레지던트 이블>의 밀라 요보비치가 가슴선이 높은 드레스를 입는 것과 마찬가지다. 게다가 아직 관객에게 낯익지 않은, 캐릭터 본연의 매력을 압도할 만한 색채를 갖지 못하는 나이의 젊은 배우들이다 보니, 독특하고 싱그러운 매력은 오히려 배가 된다. ‘엘리자베스 베넷’ 역할의 릴리 제임스는 혼자서 마을 두 개 정도는 거뜬히 지킬 수 있는 당찬 둘째딸을 연기한다. ‘제인 베넷’ 역할의 벨라 헤스콧은 미스터 빙리에 목매다는 어여쁜 첫째딸 이상이다. 또 중견 배우는 그 나름대로 분발하여, 원작에서는 얄밉기 짝이 없는 아줌마에 불과한 캐서린 영부인이지만 <좀비>에서는 레나 헤디가 <왕좌의 게임>에서만큼이나 강렬한 존재감을 자랑한다.



사실 이 영화의 재미 또는 매력은 고전 속 여성 캐릭터를 재조명했다는 데에서 출발하고 끝난다. 그 이상을 기대한다면 처참하게 실망할 뿐이다. 그러나 일단 영화를 보기 시작하면, 드레스를 입고 안대를 찼음에도 불구하고 칼과 총을 손에서 놓지 않는 건강하고 아름다운 여성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의 매력은 단지 남성 주인공을 위해 소비되는 종류가 아니다. <좀비>의 또다른 장점은, 그녀들이 좀비들에게 죽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마음 편하게 볼 수 있는 좀비 영화는 없을 것이고, 패배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여성 영화도 없을 것이다. 비록 서사의 즐거움은 모자랄지언정 <오만과 편견>을 생각하면서 다소 느긋하고 평화로운 마음으로 피튀기는 스냅샷을 감상하면 된다. 멋진 장면이 나오면 앞으로 또 고전적 여성 캐릭터가 어떻게 진보할 수 있을지 상상해 볼 수도 있다. 캐릭터는 변해도 해피엔딩은 영원할지니, <제인 에어>의 버사가 꼭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처럼 절멸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소설과 같이 18세기적 해피엔딩을 맞이하는 제인과 엘리자베스를 보며 언젠가는 <매드맥스>의 여성들도 평범하고 알콩달콩한 결말을 맞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릴리 콜린스의 드레스와 총, 해피엔딩이 이루는 삼위일체가 아주 나쁘지만은 않다. 이상한 재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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