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헤이즐 Jun 25. 2017

비틀린 애정, 에이리언:커버넌트

집착에 대한 SF 멜로드라마

<에이리언 : 커버넌트>는 장르로 거짓말을 한다. 물론 오로지 한 장르로 분류될 수 있는 영화가 있겠느냐만은 그래도 특정한 영화를 볼 때 로맨틱 코미디에, 멜로에, 액션에, 스릴러에, 하드고어에, SF에 기대하는 바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커버넌트>는 SF에 대한 기대, 스페이스 오페라 또는 호러영화에 대한 기대에 부응하지 않는다.  <프로메테우스>나  <에이리언> 시리즈와 계보를 달리 하며, 차라리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파리에서의 탱고>, 루이 말의 <데미지>, 로브 라이너의 <미저리>를 연상시킨다. 한마디로 <커버넌트>는 한 안드로이드 ‘데이비드’(마이클 패스밴더)의 욕망이 빚어내는 파멸을 그린 강력한 멜로드라마다.


데이비드가 왜 그런 욕망을 가지게 되었으며, <커버넌트> 영화 전체를 쥐락펴락할 정도로 강력한 힘을 자랑해야 하는지 전작을 보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다. 전작 <프로메테우스>는 <에이리언> 시리즈의 우주관에 부응하는 동시에, 독립적인 캐릭터와 문제의식을 갖춘 영화였다. 반면 <프로메테우스 2> 대신 <에이리언 : 커버넌트>라는 이름으로 개봉한 이 문제작은 <프로메테우스>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다. 에이리언 시리즈와 <프로메테우스> 모두 어느 순서로 보아도 영화 자체를 즐기는 데 큰 상관이 없는 반면 - 물론 만들어진 순서대로 보는 것이, 감독이 그려내는 캐릭터가 풍성해지는 과정을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프로메테우스>에 대한 이해 없이 <커버넌트>를 온전히 즐기기는 힘들다. 전작의 주동인물이었던 엘리자베스 쇼(누미 라파스)와 데이비드(마이클 패스밴더)가 어떤 형태로든 등장하고 있고, 무려 마이클 패스밴더는 또다른 안드로이드 ‘월터’ 역할까지 이중으로 맡고 있다. 데이비드가 영화 속에서 여러 설명을 상세하게 제시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데이비드 때문에 두 영화는 끈끈하고도 뒤틀린 형태로 연결되어 있다.



<프로메테우스>에서 엘리자베스와 찰리(로건 마샬 그린), 비커스(샤를리즈 테론), 웨이랜드(가이 피어스)를 비롯해 인간 탑승객들이 제각기 목적과 주체성을 갖고 움직이며 갈등을 빚어냈던 반면, <커버넌트>의 인간들은 단지 데이비드와 어떤 관계를 맺기 위해, 데이비드의 특정한 면모를 보여주기 위해 등장하는 것만 같다 (한마디로 몹시 멍청하며, <스크림>이나 <나는 네가 지난 여름 한 일을 알고 있다>의 인물들보다 더 불나방 같다). ‘프로메테우스’ 호가 엔지니어들을 찾아 떠났다가 실종된 후, 커버넌트 호는 인류의 생존을 보장하기 위해 길을 나선다. 그러다 프로메테우스의 생존자인 데이비드가 보내는 신호를 받고 데이비드와 만나게 되며, 데이비드의 미스테리한 행위 때문에 그들은 위험에 처한다(다시 한번 말하지만 멍청하기 그지없다).



<프로메테우스>에서 인류의 탄생에 대해 제기했던 문제의식을 <커버넌트>는 한 수 더 심화시킨다. 아버지와 아들 간의 창조자-피창조자 콤플렉스는 엔지니어-인간, 인간-데이비드 관계에서 드러났는데, <커버넌트>는 데이비드를 통해 그 콤플렉스가 어디까지 엇나갈 수 있는지 보여준다. 인간을 기껏 만들어 놓고는 죽이려 했던 엔지니어처럼, 인간도 기껏 기계를 만들어 놓고는 인간을 흉내낸다고 무시한다. 데이비드는 그런 인간을 멸시하며, 자신이 인간에게 대등한 존재로써 사랑받지 못하는 이상에야 그런 인간을 파괴하고 싶어하며, 나아가 자신도 누군가의 창조자가 되고 싶어한다. 이는 사랑, 맹목, 집착, 파멸의 연쇄 과정에 다름아니다. 데이비드는 엘리자베스와 웨이랜드로 대변되는 인간을 사랑했고, 인정받을 수 없어 집착했으며, 사랑받을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을 파괴해 버린다. 커버넌트 호의 탑승객들이 그 똑똑한 머리에도 불구하고 처참한 최후를 맞을 수밖에 없는 이유, 박복한 운명이지만 끝까지 살아남은 <에이리언> 시리즈의 시고니 위버와 달리 파멸로 달려가는 이유도 데이비드의 변질된 욕망에 있다.



<커버넌트>는 굉장히 단순한 줄거리를 가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쾌하지는 않다. 인간이 자기 근원에 대해 가지는 막연한 호기심과 그 대가를 <프로메테우스>에서 보여줬다면, <커버넌트>에서는 훨씬 본격적으로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와 딸, 부모와 자식 간의 줄다리기를 다룬다. SF라는 장르는 미장센을 위한 껍질일 뿐, 사실 배경은 어디라도 상관없었을 것이다. 배배 꼬인 인물이 빚어내는 찝찝한 결말 탓에 <커버넌트>는 폭넓은 호소력을 가지지는 못한다. 내가 가지지 못할 바에야 부셔버리리, 라는 식의 이야기가 유치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과 안드로이드와 엔지니어와 에이리언이 만들어내는 복잡다단한 가계도를 벗어나서, 있는 그대로 유치하게, 그리고 단순하게 생각한다면, 고대 신화에서부터 여러 형태로 변주되어 내려오는 인간의 욕망이 가지는 플러스와 마이너스의 힘을 되짚어 볼 기회가 된다 - 숨을 쉬는 생명체가 둘 이상 나오는 한, 거의 모든 영화는 멜로드라마로 귀결될 수밖에 없기도 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