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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이즐 Jun 25. 2017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신세계

거짓된 힘과 날조된 아름다움

선의의 거짓말이 어디까지 용서받을 수 있는가의 문제는 엄마와 아빠 중 누가 더 좋은가의 문제만큼 역사가 깊고 또 어려운 것이다.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정도의 거짓말은 괜찮다는 것에 많은 사람들이 암묵적으로 동조하는 것 같고, 나도 한때는 거짓말 따위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거짓말이 뭐가 나쁜가, 그 정도는 장 뤽 고다르의 말처럼 거짓말이 아니라 실수 또는 장난이라고 해야 하는게 아닌가. 그러나 점차 거짓말이라는 행위 자체가 주는 무게감이 만만치 않음을 느끼고 있다. 거짓말의 문제는 그것이 남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위험성에 있는 게 아니라, 그것이 언제 부서질 지 모르는 모래성과 같다는 불확실성에 있다.



<신세계>는 <무간도>와 <디파티드> 및 여타 많은 영화들 - 심지어 <분노의 질주>의 폴 워커도 처음에는 경찰이었고, 위장수사는 미국드라마의 단골 소재다 -이 제기하는 문제의식을 가져온다. 세련되고도 위태로운 삶의 주인공들을 보여준다. 한때는 경찰이었고 지금도 분명 누군가에게는 경찰인,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기에는 거물 조직폭력배 중 하나인 자성(이정재)의 삶은 거짓 아닌 부분을 발라내기가 힘들다. 처음에는 잠입수사를 위해 정청(황정민)에 접근했지만 8년이 지난 지금은 그가 정말 자신의 혈족 같은 동지인지, 여전히 감시해야 할 적인지 구분할 수 없다. 그는 모두에게 거짓된 삶을 보여주고 있지만 자기 스스로도 어느 것이 거짓이고 또 진짜인지 구별할 수 없다. 적과 아군이 자기 안에서 이미 뒤섞여 있어, 손가락 하나만 건드려도 부서지기 일보직전이다.



정장을 차려입고 바둑을 두는 자성의 모습은 멀쩡하기 그지없지만, 언제 무너지거나 빼앗길지 모르는 것이기에 더욱 불안하다. 조직폭력배 속에 심복을 심어두고 서로가 서로에게 칼끝을 겨누는 상황을 만들어야 하는 강과장(최민식)도, 배신과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며 자기 밥그릇을 찾아야 하는 정청과 중구(박성웅)도 백척간두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은 다를 바 없다. 일견 권력의 정점에서 남들을 쥐락펴락하며 자기 멋대로 살고 있는 것 같지만, 그 삶이 언제 끝날지 모르기 때문에 그들은 절대로 왕이 될 수 없다.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신기루 궁전보다, 내 손에 잡을 수 있는 지푸라기 초가집이 더 행복한 것은 당연지사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부인, 친구, 인생은 광대놀음에 다름아니다.



나 자신조차 믿을 수 없는 삶이 얼마나 비참한지, 거짓말 때문에 얼마나 큰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 <신세계>는 조직폭력배와 경찰이라는 상징을 빌려 잘 보여준다. 우리의 삶에서도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일은 없을지언정, 그에 맞먹는 고통에 시달리는 일은 충분히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자기가 한 거짓말 때문에 자기의 운명을 결정할 수 없는 아이러니한 상황은 누구에게나 온다. 마치 거짓말의 유혹이 언제든 닥쳐오듯이 말이다.



<신세계>의 등장인물도, 화면도, 소품도 매끌매끌하고 아름답지만, 미화되었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 것은 바로 그 뒷면에 숨은 비참함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 삶에서 거짓을 선택하는 순간, 우리는 그 거짓에 발목을 내주게 된다. 내 스스로 많은 선택지를 버리게 된다. 다른 선택지를 원한다면 아예 다른 이름과 다른 신분으로 혼자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밖에 없는, 즉 그 삶 전체를 버리는 수밖에 없는 가혹한 인생을 살게 된다. 좀 더 나은 내일을 바라며 했던 거짓말이 어떻게 인생을 좀먹기 시작하는지 보여주는 영화라 나는 늘 <신세계>가 끌리고,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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