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헤이즐 Jun 29. 2017

절벽을 등진 사람들, 대립군

인간을 지배하는 숙명


영화 <대립군>을 보고 가장 먼저 떠올릴 만한 단어는 (물론 ‘잘생겼다’를 제외하고), 빅토르 위고의 소설에 나오는 “아나키”일 듯 하다. 숙명을 뜻하는 라틴어는 <노트르담 드 파리> 주인공들을 의지와 상관없이 마음대로 휘둘렀듯이, <대립군>의 등장인물들도 손아귀에 쥐고 흔든다. 고귀한 자와 비천한 자를 가리지 않고, 선한 자와 악한 자를 가리지 않으며 숙명은 인간을 지배한다. 그리고 인간은 그 숙명에 대항한다, 그것이 덧없는 몸부림으로 끝날 것이며 결국에 모든 인간이 똑같은 결말을 맞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영화는 남의 군역을 대신하며 생계를 꾸린 대립군들과, 하루아침에 분조의 왕이 되어 전쟁을 치르게 된 어린 광해군의 이야기를 다룬다. 한때 역사가 외면했던 사람들이 교차한다는 점에서, 임진왜란이라는 시대적 배경과 더불어 흥미를 돋우는 요소를 많이 담고 있다. 그러나 놀랍게도 영화는 밋밋하고, 평탄하고, 지루하며, 단선적이다. 스토리텔링이나 드라마가 주는 즐거움은 거의 없다. 아마 기승전결이 분명하지 않고 카타르시스를 느낄 만한 방점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광해(여진구)와 토우(이정재), 곡수(김무열)을 비롯한 인물들은 변화하지 않고 그저 이미 알고 있던 뭔가를 깨달을 뿐이다. 광해는 자신이 한번도 아버지에게 사랑받지 못했음을, 왕궁에서 자란 자신은 한낱 어리석고 연약한 소년임을 깨닫는다. 토우와 곡수는 대립이 끝나도 자신의 목숨은 제 것이 아니고, 나라를 뺏겨도 제 숙명, 또는 팔자는 변하지 않음을 실감한다.



무엇보다 영화는 인간의 필멸을 매우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왕도 죽고 대립도 죽는다. 신하도 죽고 백성도 죽는다. 광해가 대립군들과 힘을 모어 쾌거를 달성하는 블록버스터적 장면을 보여주는 대신, 사람 너댓명이 싸우는 듯 초라한 장면을 보여줄 뿐이다. 당시 조선의 곤란한 상황을 묘사하기 위한 의도도 있겠으나, 어쨌든 인간 그 자체에 주목하게 함은 틀림없다. 광해와 대립군들은 전란을 타개하지 못하고 여기저기 굴러다닌다. 팔자는 보이지 않는 손처럼 그들의 생사를 쥐락펴락한다.


영화를 보면서 지루함에 잠이 쏟아질 수도 있다. 광해를 압도하는 무력감이 관객까지 압도해 버린다. 훨씬 더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었다. 임란에서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 도망가는 대신 산 속 요새에서 전투를 치르려 결심하는 모습은 마치 <반지의 제왕 - 두 개의 탑> 속 오크들과 싸우는 인간을 연상시키지 않는가. 그러나 호흡 조절에 실패한 탓에, 인물들 하나하나에 몰입하기는 쉬움에도 불구하고 이야기 전체에서 긴장감과 속도감을 느끼기는 어렵다. 영화에서 재미, 감동, 또는 “숙명”을 찾는 것은 오롯이 관객의 몫이다.



그러나 <대립군>은 여러 번 곱씹어 볼 만한 영화다. 역사적 맥락에서나, 인간의 본질이라는 존재론적 맥락에서나 그렇다. 슈퍼히어로물과 성장기에 익숙한 사람들로서는 불편하고 피곤하고 난감한 영화일 수밖에 없다. 여러 모로 허술한 이 영화를 살리는 것은 마치 아름다운 스틸컷을 이어붙여 놓은 듯한, 제 역할을 다하는 화면들이다. 얼굴 뒤 배경을 날려버리는 아웃포커싱이 영화 전체를 주도하며, 인물들의 심정이 얼굴에 절절히 드러난다. 아버지에게 토끼굴로 몰린 아들의 심정이 저럴까. 생사고락을 같이 한 벗을 잃고 자기 목숨도 백척간두에 달린 인간의 심정이 저럴까. 기댈 곳 하나 없이 혹시라도, 만에 하나, 라는 기대감 하나로 연명하는 사람의 얼굴이 저럴까. 암벽이나 갈대밭 같은 배경을 보자면, 산속을 헤집으며 로케이션 촬영을 강행한 보람을 느낄 만 하다. 대립군과 왕의 의상도, 마치 마음을 짓누르는 듯한 영화의 분위기에 일조한다. 전란 중인 왕가의 의상답게 채도와 명도를 낮춘 의상이 아름답고, 가죽을 누벼 만든 대립군들의 옷은 거칠게 몸에 들러붙는다. 



<대립군>은 눈은 아름답고 정신은 피곤한, 연기는 훌륭한데 연출이 성긴, 재미있어질 만도 한데 끝없이 지루한, 그러나 또 그만큼 생각의 여지를 주는 영화다 - 곡수의 소리에 맞추어 광해가 춤을 추는 장면이 자칫 우스꽝스럽게 느껴지지 않고 참혹하게, 가슴 아프게 느껴지는 것만도 다행이다. 무능한 왕을 둔 백성의 설움, 냉정한 아비를 둔 자식의 설움, 목숨값을 가지지 못한 빈자의 설움, 그저 태어나 서러운 인간의 설움이 영화에 축축히 묻어 있다. 결국 아나키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카타르시스를 기대하는 것이 무리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는 기대한다, 비록 영화는 끝났을지언정 배를 타고 건너간 광해가 계속해 투쟁하기를. 그것이 얼마나 덧없게 끝날지 알면서도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각자의 음악들, 이웃집에 신이 산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