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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이즐 Jun 27. 2017

각자의 음악들, 이웃집에 신이 산다

우리는 나름 아름다운 인생을 살고 있다

자코 반 도마엘은 <제8요일>, <미스터 노바디> 등으로 유명해진 벨기에의 영화감독이다. 같은 프랑스어를 쓴다는 이유로 많은 영화 데이터베이스에서 벨기에 영화를 ‘프랑스 영화’로 분류하기도 하지만 - 아마 퀘벡 사람도 프랑스 사람도 벨기에 사람도 모두 싫어하지 않을까 -  프랑스의 프랑스와 오종, 캐나다의 자비에 돌란과 벨기에의 다르덴 형제가 서로 다르듯 벨기에 영화도 그만의 색깔이 있다. 물론 영화에 어떤 지역성을 부여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리고 벨기에 영화라는 것의 고유성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자코 반 도마엘의 <제8요일>은 관객이 벨기에 영화에 기대할 법한 성질을 잘 보여준다. 현실을 냉철하게 투사하는, 기묘한 유머감각 같은 것 말이다.



성미가 고약하고 고성방가를 일삼는 아버지, 세상 사람들이 신이라고 부르지만 자기에게는 욕설을 입에 달고 사는 아저씨에 불과한 남자에게 딸이 반기를 들면서 영화는 시작한다. 어떤 종교에서 상상하고 섬기는 신과도 거리가 먼 듯한 아버지와, 그에게 반항하기 위해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이 죽는 날짜를 공개해 버린 딸의 모습은 비현실적이거나 아스트랄하게 다가오기보다, 오히려 무척 그럴듯하게 그려진다. 만약 세상을 일주일 만에 창조한 신이 있다면, 그래서 세상 만물을 자신의 소유물로 생각할 만한 존재가 있다면 그는 이 아저씨만큼 가부장적이고 제멋대로일 만 하다. 그리고 그 딸이 있다면, 오빠를 모범 삼아 세상 사람들을 구경하러 떠날 만 하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언제 죽을지 알게 된다면, 세상 사람들은 비탄이나 회의, 절망이 아니라 오히려 무기력한 고요 속으로 빠져들 만 하다 - <멜랑콜리아>에서 지구가 소행성과 충돌할 것을 알게 된 여인도, <노잉>에서 지구의 종말을 알게 된 노부부도 가만히 그 끝을 기다리지 않던가. 사람을 공포에 질리게 만드는 것은 끝 자체가 아니라 언제 끝이 올지 모른다는 불확실성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저지른 실수, 또는 잘못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 그리고 열두 제자를 찾아 나선 오빠처럼 자신도 나름대로 인간을 이해해 보기 위해,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신약성서를 쓰기 위해 딸은 세상 밖으로 나선다. 그녀 나름의 기준으로 찾아낸 제자들은 하나같이 가련하고 보잘것없다. 어딘가 나사가 빠진 듯 비틀거리는 인간들이고, 그녀가 굳이 날짜를 가르쳐 주지 않았다 해도 각자의 절망에 익사했을 법한 인간들이다. 그녀는 조용히 그들에게 다가가 가슴에 귀를 기울인다. 그녀는 오빠처럼 물을 포도주로 바꾸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할 수는 없지만, 그들에게 이렇게 얘기해 줄 수는 있다 : “당신에게는 당신만의 음악이 있어요”, 당신에게는 오직 당신만의 삶의 방식이 있고, 살아가는 이유가 있어요.



당신이 비록 길거리를 헤매는 노숙자라 해도, 범죄자라 해도, 변태나 우울증 환자라 해도, 살면서 너무나 중요한 것을 잃어버렸다 해도 당신에겐 여전히 당신의 음악이 있다고, 그것은 누가 감히 당신에게서 빼앗을 수 있는 게 아니라 당신의 심장에 깃들여 있는 것이라고, 그래서 당신은 그 자체로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그녀는 인간들의 삶에 개입하거나 그들을 조종하려 드는 대신, 그들을 놀라게 만드는 대신 그저 헨델과 퍼셀, 슈베르트의 음악을 들려줄 뿐이다. 이미 그들이 갖고 있지만 그 가치를 잊고 있었던 무언가의 존재를 새삼 알려줄 뿐이다.



<이웃집에 신이 산다>는 신, 또는 신성이라는 개념을 빌려올 뿐 그 권위에 의존하지 않는다. 이처럼 매우 현실적이고 차분한 어조로 우리 모두의 삶에 이유가 있음을 돌아보게 도와준다. 찌들린 어머니, 반항적인 딸, 집 나간 오빠도 모두 삶의 방식을 존중받을 자격이 있다. 퍼셀이든 헨델이든 라흐마니노프나 텔레니우스 몽크든, 각기 귀하고 아름다운 음표를 갖고 있다. 삶이 무가치하게 느껴지는 때가 반드시 오겠지만 또 그때마다 한 소녀가 우리의 음악을 찾아줄 수 있기를, 신 아닌 영화의 이름을 빌려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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