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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이즐 Jun 25. 2017

찌질함의 힘, 스콧 필그램 vs 더 월드

결국엔 찌질함이 세상을 구원할거야

찌질하다는 것은 특권이다. 세상에 평범한 사람을 찾기 힘들듯 제대로 찌질한 사람도 찾기 힘들다. 찌질한 것과 치사한 것, 찌질한 것과 야비한 것, 찌질한 것과 생각이 얕은 것, 찌질한 것과 이기적인 것은 하늘과 땅만큼 다르다. 반면 찌질한 것과 어리석은 것, 찌질한 것과 생각이 느린 것, 찌질한 것과 속세에 어두운 것, 찌질한 것과 한마디로 다소 바보같은 것은 꽤 겹치는 부분이 많은 듯하다. 찌질한 것과 자기만의 세계에 몰두하는 것은 대동소이하며 심지어 필요충분조건으로 봐도 좋다. 남이 뭐라고 하든 자기가 몰두할 만한 뭔가를 갖고 있는 것, 그것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버리지 않고 지켜나가는 것은 찌질한 자의 재능이자 특권이다. <스파이더맨>의 피터 파커가 메리 제인과 숙모와 피자 배달 아르바이트를 성실하게 여기듯 말이다.



에드거 라이트의 <스콧 필그림 vs 더 월드>는 괴짜 같고 찌질한 '스콧 필그림'의 러브 스토리다. 그는 현재 '섹스 밥-암'이라는 동네 밴드의 대체 가능 베이시스트이자 백수다. 앞날에 도움 하나 안 되면서 얄미운 말을 내뱉기 일쑤인 여동생과, 그런 여동생의 애인을 빼앗기 일쑤인 게이 룸메이트와, 어떻게든 유명해지고는 싶은데 뭔가 많이 부족한 밴드 멤버들 사이에서도 스콧 필그램은 자기 인생을 소박하게 꾸려가고 있다(고등학생 '차우'와 파릇파릇한 연애사업을 시작해 오락실에서 실력을 뽐내는 필그램은 귀엽기 그지없다). 평생 한 동네에서만 살아왔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박진감 넘치는 삶을 살아갈 것 같지는 않은 찌질이다. 그런데 이런 스콧 필그림이 운명의 여인 - 기분에 따라 자기 머리 색깔을 바꾸는 '라모나'와 사랑에 빠지게 되면서 그의 인생은 급류에 휩쓸린다.



라모나를 차지하기 위해 사악한 7명의 옛 연인들과 전쟁을 치러야 하는 스콧 필그림 (이런 역할을 잘 해 낼 수 있는 사람은 폴 다노를 제외하면 마이클 세라가 유일한 것 같다). 코믹북이 원작이니만큼 영화의 편집은 엄청나게 펑키하고 스피디하며, 만화 대사를 그대로 따 온 듯한 자막들이 흥을 돋운다. 색감과 음악은 불꽃놀이처럼 팡팡 튀고, 스콧과 라모나를 비롯한 캐릭터 한 명 한 명이 마블의 히어로들처럼 강렬하다. 아케이드 게임의 마스터로 보이는 여고생 '차우(엘렌 웡)', 타이밍 따위 무시하고 원투쓰리포를 외치는 드러머 '킴(알리슨 필)', 피도 눈물도 없이 룸메이트를 쫓아낼 줄 아는 매력의 소유자 '윌레스(키에란 컬킨)'를 또 어디서 만날 수 있을까. 채식주의를 선언한 덕분에 뇌의 잠재력을 100%로 활용할 수 있는 슈퍼맨 남친(당연히 브랜든 루스가 연기한다) 같은 캐릭터를 보고 있자면 에드가 라이트의 B급 지수 역시 마스터급에 도달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찌질한 남정네 스콧은 일곱 명의 옛 애인들과 대적하는 과정에서, 라모나뿐만 아니라 차우, 월레스, 킴 같은 친구들과도 소소하지만 중요한 실갱이를 하게 된다. 그의 소중한 일상을 이루는 조각들이 스콧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스콧은 또 그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가 조금씩 보인다. 스콧 필그림도 라모나 못지않은 "나쁜X"이었구나, 사람의 연애란 게 진짜 웃기고 간사하구나, 다들 어쩔 수 없이 찌질해지는 순간이 오는구나, 라모나에게만 7명의 연인 동맹이 있는 건 아니겠구나, 생각해 보니 나도 좀, 꽤, 상당히, 누구 못지 않게, 찌질하구나. 차우처럼 애인을 되찾겠다고 머리를 물들이고, 라모나처럼 누군가의 관심을 끌고 싶어서 쿨한 척 하고, 킴처럼 상처받았다는 말을 제대로 못 한 채 쌀쌀맞게 굴고, 스콧처럼 중요한 말을 할 만한 타이밍을 일부러 놓쳐버리고. 누구랄 것도 없이 다들 각자의 인생에서 찌질함을 무기로 삼는 때가 오는구나.



<스콧 필그림>의 진정한 재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말도 안되는 상황과 화면에 피식 웃다가, 영화 중간중간에 문득 머리가 아찔해지는 것이다. 일곱 명의 옛 연인들마저 하나같이 미워할 수 없고, 다만 영화 속 수많은 인물들 중 하나를 유심히 살펴보면서 묘한 기시감을 느끼는 것이다. B급 영화의 목적이 가볍되 가볍지 않은, 어이없이 허를 지르는 데 있다면 <스콧 필그림>은 아주 유쾌한 방식으로 그 목적을 달성한다. <킹스맨>과 <킥애스>같은 잘 빠진 B급(사실은 A++급) 영화 덕분에 요새는 어지간한 B급 정신으로는 승부를 보기 힘든데데, 에드거 라이트는 그런 어이없는 틈새 정서를 무리없이 밀어붙이며 관객을 웃게 하고, 즐겁게 하고, 멍하게 한다. 



스콧 필그림이 과연 7명의 연인을 모두 무찌르는지 자체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영화의 제목이 <스콧 필그림>이지만, 스콧 필그림의 이야기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그의 과거와 현재에서 엿보이는 주변인 하나하나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들은 모두 찌질하다. 그러나 한심하지도 얄밉지도 않다. 모두 제대로 찌질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사랑에 목숨을 건 차우, 옛 남자친구 앞에서 허세를 부리는 엔비(브리 라슨), 유명한 클럽 무대에 서고 싶어하는 멤버들 모두 어느 정도 병맛 넘치게, 어리석게, 약삭빠르지 못하게, 그러나 최선을 다해서 순간을 살고 있다. 정말로 찌질함은 무기이자, 내 자신을 지키는 훌륭한 수단이며, 충실함과 소박함의 또다른 모습이기도 하다. 우리가 찌질해져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순도 백 퍼센트의 찌질함을 자랑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찌질하게 매달리고 찌질하게 솔직해져야 한다. 스콧 필그림이 7명의 연인들과 싸울 수 있는 힘, 감히 "스콧 필그림 대 세상"의 전쟁을 벌일 수 있는 힘은 바로 그런 순수한 찌질함에 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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