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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이즐 Feb 18. 2019

 곡성, 혐오사회를 향한 통곡

이질성에 대한 공포에서 출발하는 참극

대체 그 이유는 모르겠는데 나는 맞춤법에 민감하다. 물론 나도 맞춤법 척척박사가 아니다. 오히려 내가 무슨 맞춤법에 맞지 않는 말을 쓰지 않을까 조마조마해한다. 애매함과 모호함을 구별하고 싶어하고 구분과 구별도 구별하고 싶어한다(이때 구분이 맞을지, 구별이 맞을지, 둘 다 상관없을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나는 이른바 야민정음이라는 것을 좋아하는데, "요즘것들"이 쓰는 단어가 정말 재미있다! 뎅뎅이(와 냥냥이), 갓띵작 같은 건 표음문자/표의문자를 가리지 않는 훌륭한 언어유희라는 코멘트를 어디서 읽은 적이 있다. 완전 일을 망쳐버림, 과 완전 일을 망쳐벌임, 의 느낌은 그야말로 완전히 다르다. ㅇㅇ해벌임, ㅇㅇ좋아벌임, 이라는 말을 쓰면서 내가 틀린 말을 쓰고 있다는 걸 알지만, 어쩌면 이게 "다른 말"로 자리잡을지 모르겠다는 기대를 해 본다. 다르다,와 틀리다, 라는 단어는 내가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맞춤법 중 하나이다. 언어가 생각의 반영이라면, 이 둘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자칫 심각한 위험을 가져다줄까 두렵기 때문이다. 다른 것은 다른 것이고, 틀린 것은 틀린 것이다. 후자는 설사 강제와 배척과 징계의 대상이 될 수 있을지언정(필요충분조건이 될 수는 없다), 전자는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필요조건도 충분조건도 될 수 없다, 완전히 "무관해벌인다").



극혐, 혐짤 등 혐오라는 말을 활용한 단어들은 아주 쉽게 쓰인다. 너무 쉽게 쓰일 때도 있다. 혐오라는 용어는 쉬운 용어가 아니다. 한자로 쓰라면 못 쓸 것 같다. 사전을 찾아보니 싫어하다, 와 미워하다, 라는 한자의 결합어다. 극히 싫어하다못해 미워하는 것이 혐오이다. 이 지극한 감정, 극단적인 용어가 난무하는 상황은 상당히 공포스럽다. 요새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남자와 여자에 대한 상호혐오인 듯 하다. 페미니스트라는 단어의 의미가 심각하게 변질되었고 마치 남녀 갈등이 메갈리언과 일베충들의 전쟁이라도 되는 듯 고양이 목을 자르거나 동영상을 함부로 공유하거나 하는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른다. 혐오감이 정점에 달한 상태에서, 지금 언제 <체체파리의 비법(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소설과 같은 일(이 소설에서 여성은 박멸해야 할 해충 같은 존재인데, 20세기 초의 인물인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예지력 아닌 예지력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이 벌어질지 걱정스럽다. 비단 벌레 '충'을 갖다붙이며 혐오감을 표출하는 것(페미충, 한남충 등)은 남녀 갈등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 걱정스럽다. 사실 이것은 요즘 언론이 좋아하는 이슈 중 하나에 다름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와 다른 것들을 공격하고 미워해 왔다. 나이가 어린 사람은 나이가 많은 사람을 무시하고 나이가 많은 사람은 나이가 어린 사람을 경멸한다. 서로 다른 인종들 또는 민족들간의 갈등도 남의 나라 얘기가 아닌데 아직까지 "한민족의 유구한 한뿌리"를 강조하는 콘텐츠들이 쏟아져나오고 있다. 다른 것은 틀리며, 다른 것은 악하고, 다른 것은 공격과 혐오의 대상이다. 나와 다른 나라는 오랑캐이다. 나와 다른 정당은 비도덕적이다. 나와 다른 사람은 틀린 사람이다. 빨갱이라는 단어가 시퍼렇게 살아있는 것은 차라리 코미디다. 관용과 톨레랑스는 단지 사전에만 존재하며, 다름에 대한 여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될까봐 너무 걱정스럽달까....


나홍진 감독의 영화 <곡성>이 나왔을 때, 무녀/무속인 문화나 마을의 수호신앙 등 여러 독특한 색채가 "스릴러의 탈을 쓴 호러 또는 호러의 탈을 쓴 스릴러"에 스며들어 좋은 작품을 만들어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 번에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보기 드문 촘촘함과 숨막힘이 있어 마치 광풍과 같이 관객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작품이 되었고 이제는 <곡성>을 본 사람들이라면 모두 감독이 의도한 줄거리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 - <곡성>은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과 외부 악귀의 싸움, 이라는 큰 틀 아래에서 어느 쪽을 믿어야 할지 모르고 갈팡질팡하는 가엾은 미물들에 대한 이야기다. 주인공 역시 수호신과 악귀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온가족을 잃어버리고 만다. 귀신 또는 악마가 결부된 스릴러라 그런지 한 번 보면 그 여운에서 헤어나오기 힘들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돌이켜 보면, 나는 <곡성>을 처음 본 후 내 나름의 생각과 해석을 놓을 수가 없다. 다만 내가 쓸데없이 맞춤법에 집착하는 사람이며 영화 <콘택트(Arrival)>의 주장대로 언어가 생각에 미치는 영향력에 대해 신봉하는 사람이고 또 나름대로 영화를 보면서 상상력을 펼쳐가는 중독자라서가 아니라, 귀신이나 영혼이나 악귀 같은 "서프라이징"한 것들을 어지간해서는 믿지 않는 유물론자라서가 아니라, 컴퓨터를 하고 뉴스를 보고 댓글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어떤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나와 다른 것들에 대해 즉각적으로 채찍질을 가하는 사람들에 대한 무서움 때문이다.



곡성은 작은 폐쇄사회다

<곡성>의 등장인물은 외부인과 내부인, 곡성 바깥에서 온 사람과 곡성 안에 머물러온 사람으로 나눌 수 있다 ('곡성'은 확실히 서울이나 부산보다는 폐쇄적인 소규모 사회로 느껴진다). 두 집단 사이의 갈등이 영화의 주축이며, 특히 외부인 중에서도 "상" "갑" 외부인이라고 할 수 있는 일본 사람(쿠니무라 준)은 일견 거의 유일한(그러니까 마찬가지로 외부에서 온 무속인인 일광(황정민)의 정체가 사실은 일본 사람과 한패라는 말을 듣기 전까지는) 반동인물이다. 어느 날부터인가 곡성에서 수상하고 끔찍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누군가들이 다른 가족을, 또는 제 가족을 몰살시키고 자기도 잔혹한 몰골로 죽어버린다. "그 일본 양반이 오고부터" 일어난 일들이라고 한다. 가족을 다 죽인 여자가 사실은 일본양반한테 성폭행을 당하고 정신이 나갔었다고, 일본양반은 산에서 고라니를 날것으로 뜯어먹는 괴물이라고 숙덕거린다. 처음에는 "버섯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난 거지, 말도 되지 않는 소리 말아라"라고 다분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던 종구(곽도원)는 어느덧 숙덕거림에 빠져든다. 아무리 봐도 약간 얼이 나간 것 같은 여자(천우희)가 "그 왜놈이 사람들 피를 빨아 죽인다"라는 말을 해도 믿는다. 왜냐면 어쨌든 일본사람은 곡성 사람이 아니니까, 종구나 그 무리들과는 다른 사람이니까, 서로 말도 통하지 않고 "저명한 대학교수인지 뭔지" 정체를 알 수 없는 모르는 사람이니까 우선적인 불신의 대상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종구의 의심은 적개심과 공격력으로 팽창한다


따라서 쿠니무라 준이 입은 훈도시와 황정민이 입은 훈도시는 다소 경멸적으로("요실금 있는 성인이 차는 기저귀") 묘사되며, 천우희가 사용하는 용어("왜놈")도 일본사람 또는 외지인에 대한 멸시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훈도시는 그들이 곡성 바깥사람이라는 것을 확실히 하는 상징이자 그들을 미워하고 믿지 않아야 할 이유가 된다. 세상에나, 두 사람은 우리와는 다른 팬티를 입는다! 점차 바깥사람에 대한 혐오는 강해지고 공격도 강해진다. 천우희는 곡성의 수호신이며, 황정민과 쿠니무라 준은 서로 손을 잡고 곡성의 피를 말려 죽이려는 악한 패거리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마을 사람들이 버섯을 먹고 환각을 보며 저지른 범죄의 책임(따라서 마을 사람과 곡성이라는 지역 자체에서 짊어져야 할 책임)을 면피하고 덮어씌우기 위해 동원된 외부인일 수도 있다. 쿠니무라 준은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당신은 내가 진실을 말해도 믿지 못할 것이다", "당신은 당신이 보고 싶은 대로 나를 보는 것뿐이지, 내가 무슨 말을 한다고 해서 당신의 생각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을 반복한다.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대로 보고, 당신이 믿고 싶은 대로 믿는다. 당신에게는 관용이 없고 양보와 이해가 없다. 당신들은 일본인을 찾아가는 처음에서부터 반감을 갖고 적의를 표출했다(남의 집에 함부로 들어가는 것부터가 문제다). 나중에는 그를 죽이려 곡괭이와 낫과 온갖 흉기들을 휘둘렀다. 왜냐면 그는 다르기 때문에, 다른 것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이미 그에게는 "다름"에 대한 불안과 적개심뿐이다


이미 "나와 다른 사람"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타인을 바라보는 사람에게 공정함, 판단력, 올바름 같은 것이 생길 리 없다. 타인에게 자꾸 눈을 주는 이유는 그 선입견을 확인하고 공고히 하려는 것이지 그에 대해 다시 이해하고 바라보려는 것이 아니다.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믿고 싶은 대로 믿고 미워하고 싶은 대로 미워하는 사람들의 끝은 절망적이다. 종구는 모든 것을 다 잃는다. 등장인물들은 거의 다 죽는다. 불관용의 끝은 결국 불관용이며, 혐오와 폭력과 몰이해의 끝이 이만큼 절망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듯하다. 이 영화는 폭력적이고 잔인한 묘사로 가득하지만 <킬빌>이나 <킹스맨>이나 <신세계>나 <살인마 잭의 집>이나 <한니발>이나 기타 등등 많은 누아르물 또는 고어물에서처럼 '폭력의 미학'을 위해서가 아니다.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회들이 맞이한 참극을 우리는 많이 보았다. 미국에서, 벨기에에서, 런던에서, 파리에서, 팔레스타인에서, 노르웨이에서 일어났던 몸서리쳐지는 일들에 대해 왜 우리는 좀 더 우리 것으로 생각하지 못하는가, 두려워하지 않는가. 





그토록 많은 혐오가 우리 주변에 있다. 나와 다른 성별, 국가, 민족, 인종, 세대, 사회적 계급을 배척하고 공격하며 멸시하는 태도는 사이코패스 범죄자들에게 있는 게 아니라 우리에게 있다. 당장 앞에 훈도시를 차고 사진기를 멘 일본 남자가 나타난다면 그를 "왜놈"이라고 부르겠는가? 그에게 당신 나라로 돌아가라고 소리치겠는가? 그의 얘기를 듣는 대신 이미 생각하는 대로, 보고 싶은 대로 그를 바라보겠는가? 혐오사회의 끝이 뻔한데도, 다름과 틀림을 섞어버릴 것인가. <곡성>의 다른 미묘함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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