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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이즐 Mar 05. 2019

도망치고 싶을 때

내가 매일같이 하는 상상


어제는 핀란드에 가는 꿈을 꾸었다. 아직 북유럽에 가 본 적은 없다. 그러니까 순전히 사진과 영화와 텔레비전에서 본 이미지가 꿈에 등장한 셈이다. 나는 꿈에서 별 것 아닌 짐을 들고 핀란드에 갔다. 여행을 다닐 때와 같이 거의 아무것도 들고 가지 않았다. 핀란드는 흐렸고 안개가 끼어 있었다. 이슬비도 좀 내렸다. 나는 그 축축한 기운을 느끼면서 아, 참 외롭구나, 라고 생각했다. 난 이렇게 또 여기까지 도망을 와버렸구나, 내가 제일 잘 하는 일을 해버렸구나, 예전에도 그렇게 달아나고 또 후회를 해 놓고는 혼자서 모든 걸 버려두고 여기까지 왔구나, 라고 생각했다  뭔가 아주 많이 슬펐다. 죄를 저지른 것처럼 마음이 아팠다 식당에 들어가서 채소가 들어간 샌드위치를 시켰는데 그 샌드위치는 정말 신선하고 상큼해서, 슬픈 와중에도 핀란드라서 채소가 맛있는 걸까, 라고도 생각했다. 그 맛을 생생하게 느끼는 와중에 잠에서 깼다  


매일같이 하는 상상은 비슷하다  그리고 그 상상대로 꿈을 꾼다  예전에는 죽은 친구와 만나는 꿈을 참 많이 꾸었다. 나는 친구가 사실은 살아 있는 것이고 그 친구의 부모님이 친구를 지켜주기 위해서(정말로 그렇게 믿었다, 너무나 그럴듯하게 여겨졌다, 아픈 친구를 지켜주려고 친구를 다른 나라나 적어도 다른 도시의 다른 학교로 보냈다고 믿었다) 친구를 감추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기다리면 그 친구를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내가 태어나서 가장 무조건적으로 사랑한 사람 중 하나인 그 친구와 반드시 만나게 될 거라고 믿었다. 그 친구와 만나는 장면을 상상하면 반드시 꿈에 나왔다. 가장 많이 꿈을 꾼 모습은 이를테면 이런 모습이었다. 나는 지하철을 타고 있다. 반대편에서 오는 지하철을 보다가 그속에 한 사람을 찾아낸다. 친구는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그 옷, 노란색 티셔츠를 입고 있다. 나는 지하철 창문을 미친년처럼 두드리다가 헐레벌떡, 아주 급하게, 지하철에서 내린다. 개찰구를 지나 반대편 개찰구로 뛰어들어간다. 그리고 지하철 플랫폼에서 친구를 만난다.


아직도 나는 친구를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거라고 믿고 있다. 이건 나의 종교이기 때문에 누구도 나에게서 이 믿음을 빼앗아갈 수 없다. 친구의 부모님도 나의 부모님도. 나는 그 친구가 혹시나 섭섭해한다면, 태어나서 너만큼 공정한 마음으로 사랑한 사람은 없을 거라고 말해주고 싶다. 예전만큼 친구의 꿈을 자주 생생하게 눈물을 펑펑 흘릴 정도로 꾸지는 않는다. 시간이 흘러서일수도 있지만 사실 나는 친구가 그렇게 도망가서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굳이 나에게 극적인 방식으로 나타나지 않아도 괜찮다. 게다가, 나는 친구를 부러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나보다 먼저 도망쳤으니까 말이다.  나는 나와 친구 중 내가 비할 수없이 빠르게 도망칠 거라고 달아날 거라고, 어디로든, 물리적인 세계로든 그렇지 않은 곳으로 사라질 거라고 의심하지 않고 믿었었다.


그래서 내가 꾸는 꿈은 다시, 친구를 떠나보내기 전과 같은 내용으로 회귀하였다. 이제 나이를 먹었고 많은 곳을 실제로 보았기 때문에 꿈은 한결 더 생생해지거나 아니면 오히려 더 추상적으로 변하고 있다. 가 보지 않은 핀란드에서 이미 먹어 본 샐러드의 맛을 느낀다  한번도 가 보지 않은 곳이지만 채소의 맛만큼은 너무나 현실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즘 점점 더 내 꿈과 현실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기도 하다. 나는 꿈에서 나쁜 일을 많이도 저지르는데, 그러다 일어나면 식은땀에 젖어 있다. 그리고 내 안에 있는 어떤 사악한 것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까,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실제로 저지른 일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데 도대체 그 책임은 누가 지고 있는 것일까 두려워하면서 고민한다. 결국엔 도망가는 꿈, 달아나는 꿈, 멀리멀리 딴 나라에서 살아가는 꿈은 이제 더 이상 꿈이 아니라, 내가 선택해야만 하는 단 하나의 외길이라고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너무나 많은 나라들이 낯선 외국어로 나를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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