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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이즐 Feb 14. 2019

점심시간에 도망치기

사무실 근처에서 혼자 커피를 마신다는 것


점심시간의 신데렐라


점심시간에는 무조건 도망쳐야 한다.  신데렐라다. 한 시간의 점심시간에 대해 특별히 불만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구세대적이라는 생각은 한다) 이전 직장은 한 시간 반, 또 그 이전 직장은 두 시간이 점심시간으로 할당되어 있었고 또 오랜 기간 프리랜서로 일했기 때문에 칼같이 딱 떨어지는 단위에 대한 아쉬움은 있다. 어찌됐든, 한 시간이든 두 시간이든, 점심시간에는 빠르게 도망쳐야 한다. 사무실을 벗어나야 한다. 어딘가 혼자 웅크릴 수 있는 공간에 들어가야 한다. 예전 직장의 또다른 장점은(회사란 늘 그만두고 나면 장점이 보인다) 휴식 라운지가 있다는 것이었다. 캡슐 소파들이 몇 개 있어서 점심시간을 보내기 좋았다. 이번 직장에는 특별한 휴식공간이 없어서 회사 1층의 스타벅스로 간다. 주변 카페 중에 가장 넓고 번잡한 곳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많은 만큼(사이렌 오더 대기번호는 20번과 50번대를 맘대로 오간다) 혼자 앉아 있는 모습과 네다섯 명이 함께 앉아있는 모습도 섞여 있다. 내가 전혀 눈에 띄지 않는 자리로 간다. 그리고 한 시간 동안 죽은 소라게처럼 바짝 숨어 있는다.


카페에서 노트북은 그냥 남 보기 좋으라고 펼쳐놓는 것 같다


노트북을 들고 갈 때도 있고 맨몸으로 갈 때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노트북은 그냥 가져간 김에 펼쳐둘 뿐이지 와이파이 연결도 하지 않는다. 맨날 똑같은 책(생각을 많이 하게 하는 책이면 안되고, 이미 문장을 다 알고 있는 소설이거나 사진이 많은 에세이 몇 권을 돌려본다)의 비슷한 부분을 전자책으로 읽거나 음악을 듣거나 한다. 무료하지만 또 중요한 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행동을 하면 도망치는 의미가 없다. 나는 어디까지고 숨어있는 것이니까. 혼자서 샌드위치를 먹고 커피를 마시고 다시 사무실로 올라갈 때까지 가만히, 가만히 있으면 된다. 사실 난 아침에는 캔커피 한 개, 점심에는 캔커피 두 개와 빵으로 지내고 저녁에는 식욕을 폭발시켜 이것저것 먹어치우는 저녁형 인간의 식생활을 몇 년째 해 왔기 때문에 커피만 마셔도 충분할 때가 많다.  그래서 커피전문점에 가는 것도 아깝지 않다. 배가 안 고픈데 남과 밥을 먹는 게 엄청난 고역이며, 점심시간에 도망쳐야 할 가장 큰 이유다.


도망쳐야 하는 이유들


많은 이유가 있다. 다른 사람과 밥을 먹을 때 받는 스트레스,  밥을 먹는 동안 무슨 대화든 해야 한다는 압박감, 속도를 맞춰야 한다는 불편함, 또 내가 먹고 싶은 메뉴를 고를 수 없다(!)는 결코 무시하지 못할 원초적인 분노에 더하여 무엇보다도 그 한 시간 남짓한 때조차 완전히 내 마음대로 말하거나 움직이거나 표정을 지을 수 없다는 좌절감이 나를 도망치게 만든다. 점심 맛있게 드세요, 하고 사무실 문을 밀어버리게 만든다. 점심마다 어디 가? 점심 약속이 있어요, 라고 예전에는 꼬박꼬박 말했었다(진짜 약속이 있는 경우도 있긴 했지만, 이 작은 회사에서 약속이 그리 많이 생기지는 않는다). 지금은 특별한 말을 하지 않는다. 굳이 물어오면 할일이 좀 있다고, 혼자 카페에서 밥을 먹고 이것저것 챙기다 올라오겠다고 한다. 충분한 것 같다. 나도 이상해 보이지 않고 남도 이상하게 생각할 것 없다. 거짓말도 둘러대는 말도 아니다. 난 진짜로 내려가서 쉬다 오고 싶다.



한 번에 두 잔을 시킬 때도 있다. 한 잔 반은 먹고 나머지는 일회용 컵에 담아온다, 오후에 캔커피와 함께 먹어야 하니까


나에게 "남이 쉽게 하는 일을 어려워하고 남이 어렵게 하는 일을 쉽게 하는 게 잘못은 아니다"라고 말해주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나는 남과 밥을 먹기 싫어하는 사람, 남에게 예의바르게 대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무리해서 공손하거나 얌전한 태도를 취하는 사람, 대화를 이어나가는 데 어려움을 느끼면서도 아등바등 애쓰는 사람, 말주변도 웃음도 없이 무색무취하게 있는 걸 보여주지 않으려는 사람이 많을 거라고도 생각한다. 또 한편으로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성격인지도 모르겠다. 어린애도 아닌데 무슨 성격검사는 다 쓸데없다. 경험에 비추어 보면 여러 이유로 단체생활을 싫어하고 나만의 리듬을 지키고 싶어하는 건 확실하다. 그러나 언제는 활달하고 언제는 예민하고 언제는 대범하고 언제는 무신경해진다. 이건 성격의 문제라기보다는 어떤 종류의 강제에 대한 내성의 문제인 것 같다. 주어진 점심시간에 한정된 메뉴를 먹으며 몇 안되는 주제로 대화를 해야 한다는 강제에 대해 견디기 싫다. 견딜 수 없다. 이미 오전에도 오후에도 충분히 강제당하고 있기 때문에 한 시간만큼은 지키고 싶다고 생각한다. 점심시간만큼은 억지로 웃거나 어색한 경어를 쓰거나 대화 소재를 떠올리려 애쓰거나 여하튼 이래저래 내 관점에서 “무의미하다” 고 느끼는 일들을 피해 도망친다.


점심시간에는 새로운 책을 읽지 않는다


그럴 거면 회사를 그만두면 되잖아, 라고 가족들은 말한다. 그런데 요즘 나는 이상하게 필사적이다. 몇 달만 더 실험해 보자, 라는 마음가짐인지도 모른다. 나는 평범하고 무난한 사람인데 왜 이렇게 유별나지 않은 생활을 견디지 못하는지 지켜보자고. 그러나 오전 동안 나는 소모된다. 에너지를 꺼내쓰면서 버티는 동안, 생각도 머리도 마음도 힘도 감정도 닳아 없어진다. 그러니 점심시간 동안 게이지를 끌어올려야 한다. 그래야 오후에 또 버티고 집으로 도망칠 수 있다. 집에 있을 때 나는 참 무표정하다. 학교를 다닐 때에도 나는 무뚝뚝하고 냉담한 편이었다. 일을 하면서부터는 좀 달라져서, 크게 말하고 크게 웃는다. 집에 들어오는 순간 목과 얼굴의 스위치를 잽싸게 끈다. 어디에다 묶어두었던 끈이 탁 끊어지는 듯하다. 



나와 코를 마주칠 것처럼 가까이 왕림해 주시는 건 잠깐이다, 고양이들도 마모될 테니까


꼭 사무실이 아니라도 다른 사람들과 살아가는 일은 언제나 나 자신을 소모하는 일이다. 남을 만나는 만큼 나의 공간을 내어주어야 하고 취향은 접어두어야 한다. 연애만큼 자기소모적인 일이 있을까? 다른 사람의 말 한마디에 마음을 다치고 또 똑같이 말 한마디로 상처를 주고, 같이 무얼 먹고 무얼 할지 매일 티격태격해야 한다. 하지만 그를 좋아한다면 기꺼운 마음에서 배려한다. 누구도 나에게 그를 만나라고 명령하거나 압제하지 않으니까. 원한다면 그를 계속 만날 수도 있고 그와 헤어질 수도 있다. 가족이나 연인을 아무리 사랑해도, 나는 한번씩 늘 도망치는 상상을 한다. 내가 핸드폰도 받지 않고 메시지도 보지 않고 가방 하나 들고 어디론가 사라지는 순간 그는 나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완전히 혼자가 될 것이다. 더 이상 나를 마모시키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와 단단히 묶여있는 만큼 오히려 떨치기도 쉽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회사란 곳은, 내가 선택한 사람들과 선택한 시간만큼 있을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끈끈하게 묶여있는 관계가 아닌지라 이상한 규칙을 "시스템"이라는 이름으로 강제한다. 느슨하지만 함부로 행동할 수도 없다. 하루에 여덟 시간 일해야 하는 곳이라면, 내가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밥을 먹고 들어와 그만큼 일해도 상관없지 않은가? 꼭 회식이라는 이름으로 누군가의 돈을 써 가면서 모두가 좋아하지 않는 메뉴를 먹어야 하는가, 또는 쿨하게 더치페이한다는 미명 하에 누군가의 취향만 반영하여 식당에 몰려갔다가 또 우르르 몰려와야 하는가? 선택의 배제, 시간의 강제는 서로 낯선 사람들이 부딪치면서 서로를 미워하는 속도를 더 빠르게 만드는 것 같다.

 


십 초 전까지 들이대다가 금방 어디로든 기어들어간다



고양이들이 나한테 잘 안겨 있다가도 금세 후다닥 도망가서 캣폴 위로, 쿠션 안으로, 소파 밑으로 숨어드는지 알 것 같다. 그네들도 함께 있는 시간과 혼자 있는 시간이 모두 필요하다. 고양이도 소모된다(게다가 그들이 나를 선택한 것도 아니다, 그러고 보니). 어젯밤에도 나는 저녁을 먹으면서 어디로 도망칠 것을 생각했다. 여행이라도 갈 것을 생각했다. 오늘 오전 네 시간 동안 나는 마모되었고, 점심시간 한 시간 동안 숨어있었다. 일단은 소멸되지 않고 남아있기 위해서. 대체 무엇을 위해서 남아있으려는 것이냐, 라고 물으면 할 말은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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