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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이즐 Aug 15. 2017

퇴사일지 #2.

그래서 이제 뭐 할 건데

잠만보 또는 체체파리


퇴사날이 오기 전부터 전전긍긍했던 것이 생활 패턴에 대한 문제였던 만큼, 오늘부터 일찍 일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평소에도 9시까지 출근하기 위해 8시 20분에 일어나는 사람이 어떻게 하루아침에 변할까. 어렸을 땐 분명 아침형이었다고 들었다. 대학생 때에는 새벽마다 수영장에 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그때의 나는 밤 아홉 시, 열 시, 늦어도 열한 시 반 전에는 잠자리에 누웠던 것이다. 태생적인 잠만보인데다 퇴사를 고민하느라 잠을 설치는 날이 쌓였다 보니 일주일 전부터는 쉴 새 없이 잠이 쏟아지는 체체파리병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오늘은 아침 일찍 일어나긴 했으나 밥을 먹은 후 곧바로 다시 잤다. 잠결에 동생과 전화통화를 하다가 점심을 먹고 또 잠을 잤다. 꿈과 현실을 왔다갔다하면서 잤다. 오늘이 빨간날이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어마어마한 죄책감에 시달릴 뻔 했다.


그러나 나는 주말 및 공휴일을 덧없이 보내는 것을 “극혐”하기도 했다. 모자란 행동력을 부득불 끌어다가 집앞 카페에 내려가 커피를 마시고 와야 하는 성질머리였다. 주말에 꼼짝도 안 하면 어때, 이불 밖은 위험하잖아. 이런 식으로 느긋하게 있을 수 있는 사람의 천성이 부럽다. 틀림없이 주중을 성실하게 보낼 줄 아는 사람일 것이다. 반면 이번 주말에는 어디 미술관이나 서울숲이라도 다녀올까, 라는 행동력이 있는 사람도 부럽다. 소소하고 확실한 재미를 찾아낼 줄 아는 빨간머리 앤 같은 사람일 것이다. 느긋하지도 부지런하지도 성실하지도 쾌활하지도 못한 나는 카페에서 노트북을 두드리는 수준에서 타협할 뿐이다. 오늘도 노트북과 지갑, 핸드폰을 챙겨들고 주상복합단지 1층의 카페로 내려가 앉았다. 내가 자랑할 만한 것은 당분이나 카페인의 일일 허용량 같은 것은 전혀 개의치 않는 무신경함 정도다. 생활 패턴의 사수가 백 배 더 중요했다.





생활과 일상, 육체노동에 대한 집념


결국 내가 직장에 들어갔던 것, 또다시 퇴사하게 된 것 모두 이 생활이라는 것을 위해서, 일상이라는 것을 내 몸으로 지켜내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나는 늘 몸을 사용하는 직업을 동경했다. 수영선수나 피겨스케이팅 선수가 되었으면 좋았지, 라고 생각해 왔다 (다소 이상하게 들릴 수 있으니 덧붙이자면 나는 첫째로 수영이나 스노우보드, 스키와 같이 혼자 하는 운동을 좋아하며 둘째로 어렸을 때부터 수영과 피겨스케이트를 배워 왔고 셋째로 지금까지 수영 하나는 잘 한다). 격렬하고 완전한 형태의 육체적 노동은 되지 못해도, 어느 정도 이상의 신체적 활동을 반드시 동반하는 직업을 원했다.


내가 도스토예프스키나 하루키가 아닌 다음에야 글을 쓴다는 것은 가장 미약한 형태의 노동이 될 테지만, 그래도 노동은 노동이다. 그림을 그리는 것은 절반 수준의 노동이고, 옷을 만들거나 사진을 찍고 꽃다발을 만드는 것도 비슷하다. 반면 도자기를 만드는 것은 상당한 노동이며 춤을 춘다는 것은 단연 지고의 노동이다. 여행 역시 노동이다. 나는 내가 창당한 노동당의 수장이자 열렬한 당원이다. 여태껏 내가 해 왔던 일은 그런 노동의 개념과는 잘 맞지 않았고, 언젠가는 제대로 된 노동을 하고 싶다는 바람을 버리지 못했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와 <블랙 스완>은 나에게 동등한 무게감을 가진다. 다만 과수원을 할 능력은 절대 없으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고 생각했다. 그게 바로 글을 쓰는 일, 그림을 그리는 일, 옷을 만드는 일, 춤을 추는 일이었다. 그러나 당장 오늘부터, 그리고 내일부터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그래서 내일부터 뭐할 거야?”


솔직히 외국 유학에 대한 결정은 아직 내리지 못했다. 비자를 처리하고 입학을 준비하는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데, 당장 하려니 겁이 난다. 친구가 카카오톡으로 물어왔다. “그래서 내일부터 뭐할거야?” 친구는 꼼꼼한 완벽주의자다. 까칠한 서울남자다. 나는 대화에든 표현에든 서툰 반면 그는 생각하는 그대로 말할 줄 알기 때문에 나 따위 일당백이다. 내 노동당 신조 따위를 늘어놓다간 세상물정 모르는 몽상가 취급을 받기 십상이었고, 나 스스로도 내게 그런 기질이 없지 않음을 알았다. 걱정이 많은 만큼 즉흥적이고, 남에게 의논하지 않고 행동해 버리는 철부지라고 늘 나무람을 들어 왔다. 그래서 장문의 카톡을 보냈다. 학교에 가려면 몸을 좀 풀어야 되니 학원에 다닐 수도 있고, 비자 심사 받으려면 여권을 제출해야 하니 외국 여행은 힘들 것 같고, 한국에 남아있을 수도 있는데 그럼 또 할 만한 일을 찾아야겠지, 라고. 내가 써본 카카오톡 메시지 중 제일 구차했다. 결국 나는 좀 있다가 몰라, 라고 한마디 더 보냈다. 친구가 답장했다. 선택지가 너무 많은데. 할 수 있는 게 많다는 건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거였다. 역시나 그놈의 불확실성이 늘 문제였다.


하지만 정말 모르겠다. 동생은 퇴사하기 한달 전부터 싱글싱글 웃고 다녔다고, 퇴사한 후 한 달 동안에도 그토록 발걸음이 가벼울 수 없었다고, 나한테 천생 바보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당장 내일 무엇을 해야 할지, 시간을 낭비하고 탕진하다 후회하는 것이 아닐지 두렵다. 셀카를 실컷 찍고 뷰티블로거로 등극해 보자. 여행사진을 올리거나 영화에 대한 글이라도 써 보자. 예전처럼 번역 아르바이트를 찾아보자. 필라테스나 요가 강사 자격증을 따자. 아니면 내일 당장 짐을 싸서 국내 여행을 가자. 머리가 터지기 일보직전인데, 모르겠다. 에어컨 소리마저 귀에 거슬리는 중이다.  


갑자기 의욕이 넘쳐 셀카를 열 장 넘게 찍었다. .


생각해 보니 이제 자칫하다간 계속 이 집의 에어컨만 쐬게 생겼다. 사무실 에어컨이나 카페 에어컨, 식당 에어컨을 쐬는 시간이 급격하게 줄어드는 대신 이 집의 에어컨만 완전 가동하게 되는 것이다. 아직 워터파크도 못 갔건만 여름은 끝날 것 같고, 또 이러다 애초의 결심을 굳히고 외국의 대학원으로 무사히 가는 게 좋을 테다. 그러나 불행한 상상과 쓸모없는 염려는 꼬리에 꼬리를 문다. 전력 부족 국가에서 배부른 소리를 하고 있으나 진심으로 선풍기는 너무 시끄러워 사용할 수가 없다. 지구 온난화와 더위와 습기와 공허한 시간을 저주한다. 자기 전까지 내일 무엇을 할지 생각할 것이다 - 적어도 퇴사일지의 목표는 잡았다. 날짜로서의 100일보다는, 숫자로서의 100을 채우려고 한다. 근데, 그리고, 그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내일부터 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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