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가 있었다. 목적지까진 꽤 먼 길을 가야 했기에, 동반자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여행자가 마주친 첫 번째 사람은 광대였다. 재미있는 일을 찾아다니고 있던 광대는 여행자와 함께 하면 뭔가 좋은 일이 있을 것 같다며, 호기심 어린 눈과 함께 자신과 함께 갈 것을 제안했다.
“저도 이 길을 여행해 본 적은 없어서. 어떤 일이 일어날 거라고 아무것도 장담할 순 없지만, 꽤 먼 길을 가야 할 것 같은데, 함께 가시겠다면 감사의 표시로 제가 가진 것을 함께 나누어 드리겠습니다.”
광대는 걱정 말라며 흔쾌히 대답하였고, 이리하여 광대는 여행자의 첫 동반자가 되었다.
그들이 걸었던 길은 처음엔 편안했다. 화창한 날씨, 그리고 아름다운 풍경. 매일매일이 꿈같은 길의 연속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어느 순간 평탄하던 푸른 길은 돌부리로 가득한 거친 길로 변해갔고 두 사람의 발바닥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러다 갑자기 화창하던 하늘에 먹구름마저 몰려오더니 소나기가 퍼 붓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불행히도 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는 척박한 길에는 숨을 곳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 많던 푸른 나무들은 그 사이 다 어디로 사라진 것인가?
광대가 여행자에게 말했다.
“당신이랑 가는 길이 신날 줄 알았는데, 힘들기만 하고 재미도 없네요. 게다가 나한테 별로 이득이 되는 것도 없는 것 같고. 길도 제대로 모르면서 왜 같이 가자고 한 거죠? 제 시간만 낭비했잖아요. 전 이제 더 이상 당신과 함께 가지 않을 거예요.”
그렇게 첫 번째 동반자였던 광대는 여행자의 곁을 떠났다.
여행자는 광대의 억지에 화가 나기도 했지만, 자신의 길을 제대로 보지 못한 탓이기도 하다며 광대가 자신이 원하던 재미있는 일을 잘 찾아가기를 빌었다.
광대랑 헤어진 후로 며칠이나 지났을까? 그렇게 걷고 또 걸었다. 한참을 걷다 보니 다시 길은 편안해졌고, 갈림길이 나타났다. 아무런 이정표도 없고,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던 순간 멀리서 다가오는 한 사람이 보였다. 그는 여행자에게 자신을 상인이라고 소개했으며, 묻지도 않은 모험담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는 여행자가 전혀 알지 못하던 새로운 내용들로 가득 차 있었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의 이야기에 푹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마침, 엄청난 좋은 기회가 있어 그곳으로 가던 중인데, 함께 가시겠소?”
“제가요? 그래도 될까요?”
“그럼요, 세상은 넓은 곳이랍니다. 좋은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고요. 함께 하지 못할 이유는 없죠.”
“그런 큰 이익을 저에게 나누어 주시겠다니… 감사합니다!”
“다만, 내가 급히 오느라 여장을 준비하지 못했는데…”
“아, 저를 안내해 주시는걸요, 게다가 이런 큰 기회까지 주시고, 먹을 것, 마실 것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 것을 나누어 드리면 되니까요.”
“고맙습니다. 도착해서 보면 절대 후회하지 않을 기회랍니다. 길을 이쪽이요. 내가 잘 알고 있으니 따라오시면 됩니다.”
여행자는 이번에야 말로 제대로 된 동반자를 만났다며 기뻐했다. 신나는 모험과 아름다운 풍경, 게다가 생각해보지도 못한 큰 기회까지 얻을 수 있다니, 정말 여행을 떠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갔다. 하지만, 길의 풍경은 전혀 변하지 않았고, 심지어 같은 곳을 돌고 있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길을 잘 안다고 했던 상인은 하루 종일 자신의 모험담을 늘어놓고 걱정하지 말라는 말만 되풀이할 뿐, 도무지 그들이 나아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이 길이 맞기는 한 겁니까? 며칠이면 된다고 하셔서 전 걱정도 않고 제가 가진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다 나누어 드렸는데, 이제 제대로 가고 있는지조차 의문이 드네요. 길을 잘 못 드셨다면 말씀해 주세요, 함께 방도를 찾아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여행자의 단호한 말에 상인은 침묵했다. 이윽고 밤이 왔다. 그날 따라 밤은 더 어둡게 느껴졌다. 짐승들의 울음소리도 유달리 크게 느껴졌던 그 밤, 그 무시무시한 밤이 지나고 아침이 왔다. 상인에게 아침 인사를 하러 일어난 여행자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상인이 자리에 없는 것이었다. 주위를 아무리 둘러보아도 상인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어쩌지? 도대체 지금 내가 있는 곳조차도 어딘지를 모르겠는 걸.’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지만, 일단 정신을 추슬러야만 했다. 왜냐면 무조건 그곳을 빠져나와 다시 자신이 걷던 그 길로 돌아가야만 했으니까…
또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상인에게 나누어 주느라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이제 거의 없었다. 하지만, 살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여행자는 자신이 걸어오던 길을 찾아 헤매고 또 헤맨 끝에, 드디어 갈림길이 시작되던 그 지점으로 올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의 판단과 느낌을 믿고 길을 선택할 것이라고 굳게 다짐했다.
여행자가 선택한 길은 아름답진 않았지만, 적당히 그늘져 있었고, 바람은 고요했으며, 평화로웠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목적지까지 이렇게만 이어진다면 힘은 좀 들었지만 그래도 무난히 도착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내심 가지게 되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여행자의 앞으로 큰 가방을 멘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여행자는 그가 또 광대이거나 상인과 같은 사람일까 내심 두려웠다. 하지만, 그 길에 사람을 만나는 것이 그리 흔한 일은 아니기에, 여행자는 반갑게 인사를 하였다.
그는 자신도 여행자라고 소개하며 함께 여행할 동반자를 찾는다고 했다. 여행자는 내심 기뻤다. 너무 기뻤던 나머지 여행자는 자신이 만났던 광대와 상인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얼마나 힘들게 여기까지 왔는지에 대해 그에게 하소연을 하였다.
그러자 그는 여행자에게 고생이 많았다며 위로와 함께, 마실 물 한 병을 여행자에게 건네주었다.
“제 가방에는 물과 먹을 것이 충분합니다. 제가 당신을 도와드리겠으니 이 길을 함께 가시죠. 함께 길을 걸으면 외롭지도 않고 혼자 보다는 안전할 겁니다.”
여행자는 그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며, 이런 좋은 동반자를 이제라도 만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한동안 두 사람은 서로의 이야기를 하며 새로운 길을 투벅투벅 걸어갔다. 며칠이 지났을까?
“제 물과 양식이 생각보다 얼마 남지 않았던 것 같아요. 오늘은 물과 양식을 나누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괜찮으시죠?”
여행자는 처음에 그가 했던 약속을 믿었기에 확신했지만, 그래도 조심히 물어보았다.
“그럼요, 걱정 마세요.”
식사시간이 다가오자 여행자는 그를 보며 기대하고 있었다.
“엇, 지퍼가 왜 이러지. 어디 끼었나 봐요. 고장이 났나? 고쳐야 할 것 같은데요. 시간이 좀 걸리겠어요.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런 것쯤은 제가 거뜬히 고칠 수 있습니다. 일단 식사는 그쪽에 남은 것으로 함께 하시죠.”
여행자는 당황스러웠지만, 금방 고치겠다는 그의 말을 믿고 남은 물과 양식을 함께 나누었다.
다음날이 왔고, 여행자는 그에게 물었다.
“가방은 고치셨나요?”
“아 네”
그는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말을 이어갔다.
“사실 제 가방이 크긴 한데, 오는 길에 물과 양식을 다 먹고 지금은 거의 빈 상태예요. 처음 만났을 때 드렸던 그 물이 마지막 남은 한 병이었거든요. 생각보다 길이 머네요, 금방 목적지에 다다를 줄 알았는데…”
여행자는 그의 말에 너무나 기가 막혔지만, 이 상황에서 화를 내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럼 우리 둘 다 먹을 물도 양식도 없으니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제가 과일나무를 볼 줄 압니다. 오면서 계속 나무를 봤는데, 과일이 열리는 나무들이 틀림없어요. 제가 과일을 따 올 테니 걱정 마세요. 그리고 제가 아는 한 이 근처에 큰 강가가 있답니다. 물도 충분하고 제가 물고기도 잡을 수 있으니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고서 그는 사라졌다.
여행자는 그렇게 그를 온종일 기다렸다. 날이 어두워지자 그는 나타났다.
“내일 하루 더 찾아봐야 할 것 같아요. 오늘 온종일 돌아다녔는데 못 찾았습니다. 아.. 이거 정말 난감하네. 그나저나 너무 돌아다녔더니 지치네요.”
여행자는 그렇게 말하는 그가 내심 안되었다는 생각이 들어, 가방을 뒤져 남은 물과 양식을 나누었다. 그는 후다닥 먹을 것을 치우고는 정말 피곤했던지 곧 잠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여행자는 내일 생각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다음날 아침, 그는 다시 먹을 것을 찾으러 간다고 하며 일찍 숲 쪽으로 걸어갔다.
한참이 지나는 듯했다. 여행자는 그가 걱정되기 시작했고, 자신도 그를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에 숲 속으로 향했다.
숲 속은 어두웠다. 나무들이 울창하긴 했지만, 그들이 간절하게 찾고 있는 과일나무가 있을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잠시 후 여행자는 그가 본 광경에 충격을 받고 얼어붙었다. 과일을 찾아 헤매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그가, 나무 그늘 아래에 누워서 자고 있었던 것이다.
여행자는 더 이상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고함을 쳤다.
“이게 뭡니까? 분명히 먹을 것과 마실 것이 가방 속에 충분하다고 말씀하시더니,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고, 과일을 찾으러 가신다고 하시더니 여기서 잠을 자고 계시단 말입니까?”
“아, 너무 피곤하다 보니.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함께 여행을 한다는 것이죠. 저는 거기에 더 큰 의미를 두고 있는데, 물이나 양식은 저에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함께 한다는 것이지요.”
숨이 막힐 것 같은 분노에 여행자는 숲을 뛰쳐나왔다. 또 다른 여행자가 숲에서 걸어 나왔다.
잠시 얼어붙을 듯한 침묵이 흘렀다.
“죄송한데, 우린 여기서 그만 헤어지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저에겐 이젠 저 조차도 살릴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로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제가 여행자님과 어떻게 먼 길을 여행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동반자가 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제 각자 알아서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자 또 다른 여행자가 화내며 말했다.
“아니, 같이 가기로 한 여행 아니었습니까? 이제 와서 그렇게 말하시면 어쩝니까? 그럼 처음부터 저랑 같이 가겠다고 말씀하지 말았어야지요. 계속 말씀드리지만 중요한 것은 함께 하는 거라니까요.”
여행자는 더 이상의 그의 이야기가 듣고 싶지 않았다. 황급히 자신의 짐을 챙겨 그 자리를 떠났다. 도대체 이 길의 끝은 어디일까? 나는 살아서 목적지에 도착할 수는 있는 것인가?
여행자가 그간의 경험을 통해 깨달은 것이 있다면, 결국 이 여행길은 혼자서 걸을 수밖에 없는 길이라는 것이다. 어쩌다 운이 좋으면 멋진 풍경도 볼 수 있을 것이고, 어쩌다 운이 좋으면 여행을 끝내고 돌아가는 이의 도움은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래도 결국은 '혼자'인 길인 것이다.
이 길, 제대로 걸어가고 있는 것이 맞기는 한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