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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파이프 PIPE K Feb 04. 2023

조라 닐 허스턴, '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

20세기, 흑인 여성이 풀어내는 할렘 르네상스의 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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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63년, 노예 해방 선언 이후 미국의 흑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떠했을까. 21세기에 이른 현재까지도 미국의 가장 주요한 사회적 이슈이자 미국 사회의 곳곳에 뿌리깊게 자리하고 있는 인종 문제는 미국이라는 국가의 근원적이고 고질적인 병폐이자 민족의 정체성과도 같은 개념이다. 해방 이후에도 백인 주류의 사회에서 언제나 타자의 입장에 놓여 있는 다양한 인종들, 그 중에서도 미국 역사의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해 온 흑인의 문화를 이해하는 것은 지금의 미국 사회를 이해하는 데에 반드시 필요한 일일 테다. 조라 닐 허스턴의 "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 (Their Eyes Were Watching God, 1937)"는 흑인 문학이 본격적으로 부흥하기 시작했던 20세기 초 할렘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소설로서, 당대 흑인 사회를 면밀히 들여다볼 수 있는 텍스트적 경험을 우리에게 생생히 전달한다.




1. 미국 흑인 문학의 계보와 허스턴을 둘러싼 평가들


  미국의 흑인 문학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Slave Narrative', 즉 자서전의 형태로 쓰여진 노예 생활 수기에 대한 탐독이 필요하다. 대표적으로 프레드릭 더글러스의 저서 "Narrative of the Life of Frederick Douglass, an American Slave"와 해리엇 제이콥스의 "Incidents in the Life of a Slave Girl", 그리고 동명의 영화로 잘 알려져 있는 솔로몬 노섭의 "Twelve Years a Slave"와 같은 작품들은 흑인 노예로서의 삶을 일인칭의 시점에서 서술하며 노예제의 비인간성을 표면으로 드러낸 바 있다. 해방 이후 시들해졌던 흑인 문학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다시 고개를 든 것은 1920년대, 할렘 르네상스에 이르러서다. 흑인들이 고유의 민속과 문화를 자신들만의 목소리로 표현하며 주류의 백인 사회로부터 주목을 받기 시작한 이 시기의 흑인 문학은, 전에 없던 문예 조류를 형성하며 미국 문학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다.


  1937년 발표된 조라 닐 허스턴의 "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는 할렘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작으로서, 30년대를 대표하는 소설을 꼽을 때 반드시 거론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주체적인 흑인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최초의 소설로 평가되는 이 작품은 문학사적인 중요성과 그 명성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평단으로부터 여러 비판을 받기도 했는데, 그 주된 논지는 허스턴의 소설에서 묘사된 흑인의 모습과 그 배경이 현실과 괴리가 있으며 따라서 소설이 인종 문제를 둘러싼 시대의 담론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당시 흑인 문학계의 흐름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뉘어 있었다. 하나의 움직임은 흑인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하여 백인의 문학에 질적으로 뒤처지지 않는, 독자적이고 수준 높은 흑인 문학을 생산해 내자는 것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백인들의 관점과는 무관한, 흑인 민중들의 삶을 가까이에서 다룬 작품들을 통해 흑인 대중 문학을 발전시키자는 것이었는데, 허스턴의 소설 "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는 둘 중 어떤 입장도 확실하게 견지하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수십 년 동안 흑인 문학으로서의 입지가 모호하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하지만, 작품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이 소설이 작품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흑인 문학이 내포해야 할 가치를 망라하고 있으며, 시대를 대표하는 소설로서의 정당성을 가진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2. 문학적인 방식으로 접근한 인종의 담론


  "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가 비판 받았던 가장 주요한 이유인 인종 문제에 대한 작가의 소극적 접근은 당대 문학계가 품었던 커다란 오해 중 하나였다. 허스턴은 '재니'라는 인물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흑인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작품 속에서 확립해 나가며, 이를 통해 현실 속에서의 인종 문제에 정면으로 맞서고 있다. 물론 허스턴의 소설이 당대의 흑인들이 놓여 있던 차별적이고 냉혹한 현실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지 않다는 비판은 어느 정도 사실에 가깝다. 그는 소설 속에서 흑인들에게 부당하게 작용하는 잔인한 현실의 면모가 아니라 재니라는 개인적인 인물의 삶과 그 속에서 비롯되는 자아 정체성에 대한 인식의 변화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학 작품이 현실을 다루는 방식이 반드시 일차원적이고 직접적인 것은 아니다. 소설 속에서 재니가 성장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해 나가는 과정은 현실 속의 인종 문제에 대한 다방면의 사유를 함의하고 있으며, 이는 당시 흑인 문학이 추구했던 가치를 충실히 구현한다. 무엇보다 자신을 백인이라고 생각했던 한 흑인 소녀가 세 번의 결혼 생활을 거치면서 온전한 흑인 여성으로 거듭나는 서사 구조가 인상적이다.


  재니는 어릴 적 백인 아이들과 함께 자라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그들과 동질의 것으로 인식하는 인물이다. (But before Ah seen de picture Ah thought Ah wuz just like de rest.) 즉, 유년기의 그녀에게는 흑인으로서의 정체성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킬릭스와의 첫 번째 결혼 생활에서 그녀는 처음으로 당대의 흑인 여성이 처해 있던 현실을 경험하게 된다. (Come help me move dis manure pile befo' de sun gits hot. You don't take a bit of interest in dis place.) 여기에서 그녀가 겪는 흑인 여성의 현실은 'Mule', 즉 일하는 노새로서의 삶이다. 재니는 이러한 현실에 수긍하지 않고 킬릭스와의 결혼 생활을 청산한 뒤 스탁스와의 두 번째 결혼을 단행하며 재력과 정치적 권력이 있는 흑인 여성의 삶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스탁스와의 결혼 또한 그녀를 속박하는 관계로 변질되고, ("Dat's 'cause you need tellin'," he rejoined hotly. "It would be pitiful if Ah didn't. Somebody got to think for women and chillun and chickens and cows.) 스탁스가 병으로 죽자 재니는 티 케이크라는 가난한 젊은이와의 세 번째 결혼 생활을 시작한다. 재니는 티 케이크와 함께 '에버글레이드'라는 공간으로 대변되는 육체 노동자의 삶을 경험하는데, 그녀는 그곳의 사람들과 몸으로 부딪히고 어울리면서 커뮤니티에 자연스럽게 녹아들며 그러한 삶에서 순수한 행복감을 느끼기까지 한다. (Ah, naw, honey. Ah laks it. It’s mo' nicer than settin' round dese quarters all day.) 백인 집안의 뒤채에서 성장한 소녀가 파란만장한 인생사를 겪으며 백인들의 재판장에 피고인으로 서는 서사 속에서 독자는 흑인들이 속해 있던 현실의 인종 문제를 생생히 목격할 수 있다.




3. 흑인처럼 사고하고 흑인처럼 말하고 흑인처럼 행동하는 인물들


  한편, 허스턴이 소설 속에서 구현한 흑인들의 언어와 생활양식에 대한 상세한 묘사들은 당대 흑인 문화 전반을 이해하는 데 있어 귀중한 역사적 사료가 된다. 물론 작가가 소설 속에서 흑인들의 방언을 비롯하여 그들의 세밀한 삶을 조망한 방식에 대해서는 당시 문학계의 비판이 잇따르기도 했다. 그들의 논지는, 그가 소설을 통해 흑인을 악의적으로 묘사하고 희화화하였으며 그 방향성에 있어 정치적 의식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류학자였던 허스턴이 흑인 민속에 대해 실행한 연구는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그 가치와 공로를 인정받고 있지만 이러한 학문적 배경을 자신의 소설에 녹여 낸 점에 대하여는 학계, 특히 당시 흑인 지식인들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했다.


  그러나 흑인들의 언어와 사고방식, 유흥거리와 노동 환경 등이 낱낱이 서술되어 있는 "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는 역설적으로 가장 '흑인'스러운 소설로서 문학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게 되었으며 대체 불가능한 역사적 사료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생동감 넘치고 사실적인 방언의 사용이 흑인 문학 특유의 리듬감을 살리고 몰입감을 높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러한 서술적 면모는 소설의 전반에 걸쳐 고루 드러나면서 일관된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지만 특히나 6장, 마을 사람들이 전부 모여 있는 자리에서 샘과 리지가 사소한 주제를 가지고 일장연설을 하며 논쟁을 벌이는 장면이나("Dis question done 'bout drove me crazy. And Sam, he knows so much into things, Ah wants some information on de subject." / "How come you want me ub tell yuh? You always claim God done met you round de corner and talked His inside business wid yuh."), 이후 다른 사람들이 합세하여 즉흥적으로 상황극을 벌이는 장면("Gal, Ah'm crazy 'bout you," Charlie goes on to the entertainment of everybody. "Ah'll do anything in the world except work for you and give you mah money.")은 상당히 긴 호흡으로 쓰여져 있음에도 흑인들의 재치 있는 어투와 주제가 돋보이기 때문에 정체된 분위기를 환기하며 오히려 본 서사에 대한 집중도를 높이는 효과를 낳는다.


  또한 허스턴은 이처럼 흑인 문화를 적극적으로 서사의 본무대로 끌어들이면서도 한편으로는 혼혈임에도 흑인들을 경멸하는 모순적인 인물, 터너 부인을 등장시키거나 (If it wuzn't for so many black folks it wouldn't be no race problem. De white folks would take us in wid dem. De black ones is holdin' us back.) 바하마 출신의 노동자들을 묘사하기도 하면서 (Since Tea Cake and Janie had friended with the Bahaman workers in the 'Glades, they, the "Saws," had been gradually drawn in to the American crowd.) 미국 내에 혼재되어 있는 인종적 현실을 다채로운 방식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이러한 서술은 흑인이라는 존재를 온전한 현실의 주체로 부상시킨다. 작가는 사실적이고 자연스러운 흑인의 문화를 작품 속에 다방면으로 녹여내며 흑인 문학의 독특한 정체성을 형성해 나간다.




4. 역사적, 문학사적 맥락을 뛰어넘는 고유의 문학성


  그러므로 "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는 당대의 문학계로부터 받았던 비판에도 불구하고 흑인 문학으로서의 충분한 가치를 내포하고 있으며 문학사적으로도 매우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작품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문학 작품을 창작함에 있어서 정치적인 목적을 함의해야 한다는 주장이 팽배했던 당시 흑인 지식인 계층의 역사적 맥락과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이 작품을 바라보았을 때, 독자들은 소설이 주는 역사·문화적 가치를 더욱 민감하게 인식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 소설의 진정한 가치는 '흑인 여성'의 문학 작품이라는 전제 조건을 배제할 때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즉, 허스턴의 소설이 문학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이 작품이 소수문학으로서의 정체성과는 별개로 고유의 문학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흑인 문학이기 이전에 액자식 서사 구조를 바탕으로 하는 개인의 성장기이자 억압 받는 인간의 현실 극복기이며 순수한 사랑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신에 대한 종교적, 존재론적 탐구의 결과물이다. 폭우와 홍수 속에서 재니를 구해 내던 티 케이크에게서 얼핏 엿보이는 예수와도 같은 인간상에서 우리는 자연과 절대적 존재로부터 삶의 해답을 찾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가는 미비한 인간 존재의 숭고함마저 찾아볼 수 있다.


  허스턴이 작품 속에 펼쳐 놓은 문학적 세계는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독자들을 설득할 수 있는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 소설은 쉬운 문법으로 쓰여진 러브 스토리다. 보편적인 인간이라면 누구나 쉽게 스스로의 경험을 대입하고 공감할 수 있는 충실한 개인적 서사 위로 자유로운 리듬의 흑인 구어와 문화가 독자들을 끌어당기는 이 작품은 내용적으로나 형식적으로나 정당한 문학적 시도를 담아내고 있으며 역사적, 문학사적 맥락과는 무관하게 '읽는 재미'를 주는 소설이다. 신의 눈을 통해서 재니가 바라보았던 흑인 여성으로서의 삶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우리는 그 답을 소설 속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라는, 다소 심오한 말뜻을 담고 있는 제목의 이 멋진 소설은 여러모로 가치 있는 문학 작품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 소설이 후대의 주목을 받고 지금의 위상에 오르게 된 데에 흑인과 여성이라는 이중적 타자가 주체로 상정되어 있다는 역사적 맥락이 강력하게 작용했음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문학 작품은 당연하게도 현실의 여러 국면을 복잡하게 내포하고 있으며 그런고로 현실로부터 온전히 분리될 수 없다. 따라서 시대의 요구와 문학적 탐구에 대한 독자, 그리고 연구자들의 욕구가 이 작품을 발굴해 낸 것은 역사적인 필연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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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ckground Image : Zora Neale Hurston. Their Eyes Were Watching God. HarperCollins Publishers LLC.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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