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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파이프 PIPE K Dec 29. 2021

가즈오 이시구로, '나를 보내지 마'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해야 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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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일본계 영국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나를 보내지 마 (Never Let Me Go, 2005)"는 <타임> 선정 100대 영문 소설에 이름을 올린 베스트셀러다. 외부로부터 단절된 기숙 학교 '헤일셤'에서 성장하여 인간을 위한 장기 '기증'을 시작하는 복제인간들의 이야기를 담아낸 이 소설은 37개국으로 번역되어 출간되고 영화로도 제작되는 등 상당한 인기를 끌었는데, '복제인간'이라는, 자칫 진부할 수 있는 소재를 가지고도 이토록 사랑 받는 소설을 써낼 수 있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1. 문학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리얼리즘


  "나를 보내지 마"가 훌륭한 소설로 평가 받을 수 있었던 데에는 이 작품이 환상성이라는 배경에 기대고 있지 않다는 점이 한몫했다. 즉, 작가는 설정상 '복제인간'이라는 SF적 소재를 소설의 주된 테마로 채택하였지만 서사의 전개 방식에 있어서는 때로 무서울 정도로 치밀한 리얼리즘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나 3명의 주인공 중 하나인 '캐시'가 1인칭 서술자로 나서며 발현되는 문학적 효과는 실로 지대하다. 이야기의 완전한 주인공도, 완전한 제삼자도 아닌 캐시는 자신을 포함한 복제인간들이 학창 시절을 지나 성인이 되어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면서 서서히 죽음에 가까워져 가는 과정을 세밀하면서도 객관적인 시선으로 전달한다. 간병인으로서 자신의 가장 가까운 친구인 토미와 루스가 장기 기증으로 죽어 가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하는 캐시의 시선은 놀랍도록 차분하며 또 서글프다.


  이렇게 매력적인 서술자의 시각에서 펼쳐지는 서사는, 비현실적인 설정에도 불구하고 그 구체성 덕분에 정교한 사실주의의 냄새를 풍긴다. 헤일셤에서의 스토리에는 소년기의 유약한 감정들이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고, 코티지라는 공간으로 시점이 전환되면서부터는 주인공들이 외부의 인물과 충돌하며 겪는 인식의 확장이 설득력 있게 드러난다. 장기 기증이 시작된 토미와 루스, 그리고 기증을 미루기 위해 간병인의 길을 택한 캐시가 내,외적으로 서서히 죽어 가는 모습은 마치 병자의 수기를 읽는 것처럼 생생하다. 작가는 이처럼 디테일하고 감각적인 서술 방식을 통해 우리와 본질적으로 다른 '복제인간'이라는 존재를 인간 고유의 영역으로 끌어들이고, 독자들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동질감을 갖게 만든다. 이질적인 속성이 사실주의적 서술로 포용되며 오히려 동일한 속성처럼 비춰지는, 독특한 캐릭터가 탄생하는 것이다.


  즉, 이 소설은 문학적 상상력을 자극시킨다. 작품을 읽어 나가며 독자들은 자신에게 일어난 적 없으며 일어날 가능성조차 없는 일들을 자연스럽게 상상하게 되고 그 과정 속에서 공감과 이해, 나아가 자아의 투영까지도 실현된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은 인물들의 '보편적인' 특수성을 통해 드러나는 견고한 리얼리즘의 색채 위에서 구현된다. 작가는 독자들이 스스로를 소설적 현실에 대입시킬 때 보다 강렬한 감정적 호소를 이끌어 낼 수 있다는 점을 전략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충분히 허구적이지만 너무나도 '인간'적이고 사실적인 캐릭터. 그 배경에 자리잡고 있는 거대하고 잔인한 현실. 이 두 요소가 병치되면서 나타나는 문학적 효과는 매우 인상적이다. 평범한 인물들을 입체적으로 빚어내며 그들 위에 드리운 진실을 비밀스럽게 비추는 방식을 통해 작가는 독자로 하여금 끊임없이 주인공들의 운명을 상상하게 만든다.




2. 헤일셤에서 코티지, 기증에 이르기까지. 개인적 성장의 연대기


  복제인간이라는 소재를 수없이 다룬 사이버펑크 장르에서는 복제인간의 윤리적 문제, 가령 인간 복제의 옳고 그름, 인간의 절대성 등에 대한 질문을 던지거나 복제인간과의 사랑, 자아를 획득한 복제인간들의 인류 침공 등과 같은 가정들을 다뤄 왔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들은 실제로 생명 기술에 대한 사람들의 의식을 제고시키며 인류의 철학적 발전에도 크게 기여한 바 있다. 하지만 이러한 사이버펑크 식의 문제 제기는 명확한 한계점을 갖는데, 이는 바로 복제인간들이 작품 속에서 철저히 타자화된다는 점이다. 인간의 관점에서 생성된 질문들은 복제인간들을 대상화하고 소외시키며 결국 인본주의를 공고히 함으로써 매듭지어진다.


  그러나 "나를 보내지 마"는 복제인간이라는 설정만을 공유할 뿐, 사이버펑크 장르와는 완전히 다른 시점을 독자들에게 제시한다. 소설은 토미, 캐시, 루스라는 구체적인 인물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되는데, 소설 내에서 이들이 복제인간임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오히려 작가는 주인공들이 '기증'을 시작하기 이전까지의 과정을 다분히 인간적으로 풀어내며 이들을 온전한 소설적 주체로 만든다. 구체적으로 이름 지어진 세 인물들은 더 이상 인간 존재의 이면에 위치하는 '대상'들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또 다른 인간 그 자체가 된다. 이러한 관점을 바탕으로 작가는 이들의 생을 어린 시절부터 차근차근 그려 나간다. '만들어진' 존재에서 '자라나는' 존재로의 이행인 것이다.


  소설 속 주인공들이 겪는 인생의 경험들은 일반적인 인간이 거치는 삶의 과정과 무척이나 유사하다. 주인공들을 포함한 많은 복제인간들은 '헤일셤'이라는 학교에서 우리와 똑같이 학창 시절을 보내며, 그들의 소년기는 우리의 소년기와 마찬가지로 여리고, 섬세하다. 따돌림의 경험, 수치스러웠던 순간들, 친구에게 느꼈던 열등감과 질투심 등 우리가 자라면서 조금씩 잊혀졌던 기억들이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통해 수면 위로 떠오르고 독자들은 이들의 청소년기 너머로 자신의 과거를 투영시키게 된다. 깊은 몰입의 순간이다. 주인공들이 갓 성인이 되었을 무렵 헤일셤을 떠나 '코티지'라는 임시 보호 시설로 보내지는 파트에도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헤일셤 출신이 아닌, 다시 말해 어두운 현실에서 자라 온 인물들과의 조우는 주인공들의 의식 세계를 확장시키고 심화시키며, 이는 우리가 '학교'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넓은 세상을 마주하는 과정을 그대로 재현해 내고 있다.


  하지만 모든 복제인간은 장기 기증이라는, 강제된 죽음을 향한 수순을 밟게 된다. 여기에서부터는 인간이 경험하지 못하는 상상의 영역이다. 자신의 운명을 거스르지 않는 복제인간들을 보며 독자는 여태껏 형성해 온 동질감에 의문을 품게 되지만 작가가 끊임없이 요구하는 '문학적 상상력'을 통해 우리는 이들이 자신의 삶을 받아들이는 방식을 천천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독자들은 텍스트 위로 자신의 삶을 다시 소환해 낸다. 인간이 공유하는 개인적 성장의 연대기를 말이다. 주체가 된 복제인간들의 이야기는 어느 순간 우리 자신의 이야기로 변화하며, 그들은 더 이상 타자가 아닌 절대적 존재가 된다. 인간을 중심으로 지탱되었던 세계가 어그러지는 것이다.




3. 생명권력의 불균형과 '잉태'라는 휴머니즘


  미셀 푸코는 1976년, "성의 역사: 앎의 의지"에서 '생명권력(Biopower)'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근대 이전의 군주가 지닌 권력이 인간에 대한 생사여탈권이 포함된, '죽게 만들고 살게 내버려두는' 권력이었다면 자본주의 체제로의 전환 이후 생산자와 고용자라는 막강한 권력 관계가 생겨남에 따라 국가가 인민에 대해 행사하는 권력이 '살게 만들고 죽게 내버려두는' 권력으로 변화했다는 것이다. 생존과 직결되는 의료 기술과 위생의 수준이 근대 이전에 비해 비약적으로 발전했음에도 생명을 지키는 권력이 오히려 삶의 편에서 불균형하게 행사되는 권력으로 발전되었다는 아이러니는 보편적인 대상을 바탕으로 하는 생명권력이 얼마나 강력한 힘인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그리고 여기, 생명권력의 절대적 피압제자인 복제인간들이 있다. 이들의 삶은 '장기 기증'이라는 수단적 성격을 띠며, 거시적 차원에서의 주체성은 사실상 결여되어 있다. 그들의 주체성과는 별개로 복제인간들은 처음부터 종속적인 운명을 타고난 것이다. 그들이 다녔던 '헤일셤'이라는 학교의 정체도 이러한 소설적 현실과 관련이 깊다. 헤일셤은, (작품의 후반부에나 밝혀지지만) 복제인간들의 인간성을 증명함으로써 장기를 사취하는 과정들이 비도덕적인 살상임을 증명하기 위해 세워진 시설이다. 교사를 포함한 관계자들은 이들에게 끊임없이 주체성을 부여하여 그 끔찍한 현실에 맞서고자 하지만 복제인간들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스스로 주체성을 부여할 수 있는 존재들이다. 따라서 이러한 작위적인 과정 속에서는 아귀가 맞지 않는 사건들이 연이어 등장한다. 결국 소설은 이미 주체적인 존재에게 인위적인 주체성을 부여하려는 시도 자체가 넌센스였음을 보여주고, 복제인간들에게 예외 없이 장기 기증이라는 잔인한 운명을 수용하게끔 한다. 이러한 서사 구조는 생명권력 구조가 지위, 경제, 정보적 권력을 압도하는 최종적 권력이며 그 앞에 놓인 개인들은 그 구조를 거스를 수 없다는 진실을 투사한다.


  물론 작가는 이러한 불균형한 생명권력과 거기로부터 오는 계층 구조를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무엇보다도 이 소설은 필연적인 권력 관계에 놓인 구조를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발생하는 정치적 입장을 최대한 배제하고 소설적 인물들의 성장과 운명, 그리고 정서적 섬세함에 집중한 작품이다. 그럼에도 이 작품을 비평하는 데 있어 생명권력의 논의를 빼놓을 수 없는 이유는 소설의 출발점 자체가 권력 계층의 최하위에 위치할 수밖에 없는 '복제인간'의 관점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작가는 생명권력에 대한 개념을 소설의 중심으로 끌고 오거나 아예 외면하지도 않으면서 강경한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에 성공한다. 바로 피압제자인 복제인간들을 서사의 전면에 배치하는 것이다. 자신의 운명에 대해 슬퍼하거나 분노하지 않고 장기 기증을 외려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인생의 단계로 인식하는 주인공들을 보며 독자들은 답답함을 느끼지만, 촘촘하게 짜여 있는 정서적 서사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어느새 그들이 자신의 삶을 받아들이는 방식을 납득하게 된다. 생명권력의 계층과 무관한 '인간성'을 보여주기 위해 작가는 점진적이고 강력한 정서적 호소를 택한 것이다.


  그리하여 작가는 남용되어서는 안 되는 생명권력에 대한 자신만의 휴머니즘을 구축해 나가며, 이 휴머니즘은 '잉태'라는 이름으로 꽃을 피운다. 소설의 초중반부에 캐시가 인형을 안고 'Never Let Me Go'라는 대중가요를 따라 부르며 행복해하는 장면이 있다. 선천적 불임인 복제인간이 '나를 보내지 마'라는 가사를 엄마가 아기에게 건네는 말로 해석하고는 자신이 마치 엄마가 된 것처럼 인형을 안고 모성의 눈물을 흘린 것이다. 이러한 캐시의 행위를 목격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헤일셤의 계획자인 '마담'이다. 생명권력의 가장 아래에 위치한 존재가 잉태해 내는 생명의 개념을 목도하고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을 흘린 마담처럼 우리도 작가가 제시하는 강렬한 휴머니즘의 메시지에 감동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소설의 후반부, 캐시와 토미가 죽음을 목전에 두고 진정한 육체적, 정신적 사랑의 행위를 이루어 내는 장면은 과연 소설의 하이라이트라 할 만하다. 이 장면은 생물학적 잉태의 가능성과는 무관하게, 관념적인 '잉태'의 형상을 이루며 작가가 빚어내는 휴머니즘을 공고히 한다.




4. 예술과 '인간의 조건'


  소설의 후반부, 가장 긴장감이 고조된 파트에서 다음과 같은 문장이 등장한다.


  "우리에게 영혼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도 있나요?"


  헤일셤에서 받았던 교육들이 자신들의 영혼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전해 들은 캐시가 헤일셤의 교장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이 질문은 우리에게 영혼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혹은 증명할 수조차 없는 것처럼) 복제인간의 영혼을 증명하려는 시도 또한 합당하지 않다는 뜻을 함의한다. 애시당초 소설은 복제인간들, 특정하자면 토미와 캐시, 그리고 루스가 우리와 같은 인간적 존재라는 설정을 전제로 하고 있다. 즉, 작품 속 사회는 엄연한 인간 존재를 수단으로 삼고 죽음에 이르게 하며, 이를 멈추기 위해 그들도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위적인 방식으로 증명하려고 하는, 잔인하고 비상식적인 면면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헤일셤에서 복제인간 아이들에게 영혼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채택한 방법은 미술, 즉 '예술'이다. 학생들은 헤일셤을 졸업하기 전까지 끊임없이 그림을 그려 자신을 표현하도록 강요받으며, 그림을 잘 그리는 것이 곧 학교에서 인정받는 학생이 되는 방법으로 여겨진다. 우스꽝스러운 그림을 그린다는 이유로 놀림을 받던 토미에게 '루시'라는 선생님이 너무 창조적인 사람이 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는데, 토미는 그 이후로 그림을 그리지 않게 되며 루시는 곧 헤일셤에서 쫓겨난다. 이는 헤일셤이 인간성 증명을 위한 수단으로 '예술'을 매우 중요시했다는 점을 보여 준다. 하지만 여러 소설적 장치에 의해 결국 헤일셤 학생들의 '그림 그리기'는 무용한 것으로 돌아가며, 주인공들이 예술이라는 개념의 실체를 발견해 내는 과정은 인간의 조건으로서의 예술, 그리고 그 순수성에 대해 많은 시사점을 제시한다.


  무엇보다도, 인간 고유의 영역으로 인식되는 예술이 소설 속에서 영혼 증명의 수단으로 활용된 이유에 대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예술은 인간의 철저한 자기 표현이며, 그 현실적 쓰임이 어떻든 작품을 창작하는 과정은 그 주체의 상당한 순수성을 요구한다. 즉, 인간의 자기만족적 욕구에서 비롯된 예술 창작 행위는 그 자체로 인간 고유의 것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소설 속 인물들의 그림에는 자신만의 고유한 욕구와 목적성, 즉 순수한 성질이 결여되어 있다. 그들의 창작 행위는 타의적이며, 마담의 갤러리에 선정되기 위함이라는 자기 외부로부터의 목적을 갖는다.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 행위인 것이다.


  하지만 종국에 토미와 캐시가 '그림'으로부터 도출해 내는 가치는 가히 아름답다. 헤일셤을 떠나 코티지에 이르러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토미는 자신을 비웃는 친구들과 창조성을 강요하는 선생님들로부터 벗어나 자기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것들을 표현하기 시작한다. 예술이라는 형식이 영혼의 근거라면 그 행위의 본질은 '감정'이다. 감정 없이는 예술을 창작해 낼 수 없다. 토미와 캐시는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자신들이 그토록 요구받았던 '그림'은 결국 자신들이 사랑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 주는 증표라는 나름대로의 결론에 도달하고, 생명을 연장 받기 위해 토미의 그림을 들고 마담을 찾아간다. 물론 그 그림들은 복제인간의 영혼 증명이라는 헤일셤 프로젝트의 일환이었음이 드러나며 생명 연장에 대한 그들의 꿈은 좌절되지만, 그와 별개로 주인공들이 도출한 결론, 즉 인간의 예술 행위는 사랑이라는 원초적 '감정'을 담아내는 그릇이라는 사고는 진정으로 인간적인 성질의 것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이러한 메시지를 캐치함으로써 우리 스스로에게도 억지스러운 인간의 조건을 강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인간의 정신을 이루는 본질을 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5. 로스트 코너, 당신이 잃어버린 것들에 대하여


  헤일셤의 학생들 사이에는 조금 특별한 믿음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환상이다. 우리가 살면서 잃어버렸던 모든 것들이 ‘로스트 코너'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노퍼크'에 모여 있다는 이 낭만적인 믿음은, 소설의 가장 중요한 뼈대로 작용하며 서사가 진행되는 내내 반복되어 등장한다. '분실물 보관소' 혹은 '잃어버린(숨겨진) 모퉁이' 정도로 해석되는 '로스트 코너'는 우리가 살면서 놓쳐 버린 인연들이나 희미해지는 과거의 추억들, 그리고 언젠가 잃어버린 삶의 중요한 가치들과 재회하고 싶다는 막연한 소원이 구체적인 공간으로 형상화되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러한 소망은 물론 현실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지만 감상적인 꿈의 영역으로서 사람들의 의식 속에 자리잡고 있는데, 작가는 이러한 꿈의 공간을 특정한 지명으로 형상화시키고 생생한 소설적 현실로 불러들인다. 루스의 근원자(복제인간의 원형이 되는 인간)를 찾아 떠난 주인공들의 노퍼크로의 여행은, 인간의 정체성 탐색에 대한 매우 중요한 알레고리다.


  소설의 중반부, 노퍼크의 한 사무실에서 일하는 여자가 루스와 무척 닮았다는 코티지 선배들의 말을 듣고 주인공 일행은 그들과 함께 노퍼크로 여행을 떠난다. 성인 잡지를 탐독하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던 루스의 근원자 찾기 여행은 그러나 뻔한 '아비 찾기 모티프'에 빠지지 않고 의미심장한 결과를 불러오는데, 바로 사무실의 여자가 루스의 근원자가 아님이 명백히 드러나면서 여행의 목적 자체가 좌절되는 것이다. '근원자 찾기'라는 분명한 목적성을 띠었던 여행은 표면적으로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서사적으로 보았을 때 이 사건은 아주 중요한 전환점으로 작용한다. 복제인간은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로부터 파생된 존재이기 때문에 고유한 인간일 수 없다는 전제가 한순간 전복되면서 루스라는 개인에게 자아와 독자성이 부여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본 서사의 한 차원 너머에서 루스라는 개인의 자아 발견이 완성된다.


  노퍼크로의 여행에서 또 한 가지 중요한 사건이 있다면 그것은 토미가 캐시에게 'Never Let Me Go' 레코드를 찾아 준 일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토미는 캐시에게 그녀가 헤일셤에서 잃어버렸던 레코드를 헌책방에서 찾아보자는 제안을 하고, 캐시가 토미보다 먼저 음반을 발견하게 된다. 캐시는 그 레코드가 자신이 잃어버렸던 것과는 다른 것임을 알았지만, 본질적으로 두 개의 음반은 동일한 속성을 지녔음을 인식하면서 토미와 루스에 대한 과거의 기억들을 무의식 속에서 끄집어낸다. 토미에게서 시작되어 결국 캐시가 자신의 두 손으로 직접 이루어 내는 이 회복의 과정 속에서 독자들은, 기억은 실체로서 현현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로서 축적된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기억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사라지고 생겨나며 또 변주된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물질로 존재하는 매개물이 아닌, 기억을 이루는 본질 그 자체인 것이다.


  어쩌면 '로스트 코너'라는 공간이야말로 작가가 이 작품에서 말하고자 했던 모든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잃어버렸던 기억들과 그 기억을 이루는 본질들. 스스로에게 부여했던 수많은 믿음과 의심들. 지금의 우리를 만들어 낸 모든 인연들. 그리고 불안정한 인식에 기반하고 있는 '자아'라는 개념.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고민하는 모든 이들에게 작가는 '너는 너다!'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듯하다. 우리가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기억들, 도처에 흩어져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한 기억들은 결국, '로스트 코너'가 아니라 우리의 내면에 본질로서 존재하고 있는 게 아닐까.




  인간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탄탄한 서사부터 소설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철학적, 윤리적 담론들, 인생에 대한 크고 작은 알레고리들과 신선한 문학적 시도 등 '클래식'한 소설이 갖추어야 할 모든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는 "나를 보내지 마"는 21세기의 새로운 '고전'이라 부를 만한 작품이다. 작가가 치밀하게 짜 놓은 서사를 찬찬히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자연스럽게 그 너머의 진실들을 발견하게 되는 이 멋진 소설을 두고 독자들이 더 논평해야 하는 것들이 있을까. 우리는 그저, 이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기만 하면 될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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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ckground Image : Kazuo Ishiguro. Never Let Me Go. Faber and Faber.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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