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통 회색뿐인 세상에서 단연히 빛나는,
-
나는 이제,
이곳의 주인공처럼 보인다
차가 멈추고 파란불이 켜지는
나만 모르는 세상에서
시시한 고독을 연기하는
와르르 흰빛을 뒤집어쓰면
잘못 떨어진 천사처럼
픽 쓰러지기도 하는
-강헤빈, '이름 없음' 中
-
이름이 뭐였더라? 미안, 요즘 자꾸 기억이 가물가물해. 생각이 안 나, 가까운 존재들부터 천천히. 아주 오래된 기억들만 남기고 전부 나를 떠나 버릴 것처럼.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나는 그냥, 살아. 불안한 지반 위에 꿋꿋이 서 있는 집들처럼, 아파도 아프다고 말하지 못하는 나무들처럼, 그냥 살아가는 거야. 삶을 꼭 붙들고, 도망치지 못하게. 밤이면 가장 낮은 자리에 누워서 색 없는 꿈을 꿔. 세상이 온통 다 잿빛이야. 나를 둘러싼 사람들도, 내 주위를 맴도는 노래들도 다 한순간의 꿈만 같아. 내 삶의 색깔은 뭐였지? 당신의 이름은 뭐였지? 이젠 잘, 기억나지 않아.
-
강혜빈. 2020. 밤의 팔레트. 문학과지성사.
Background Image : (C) 2019. PIPE 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