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나지 않는 생을 기억해 보려고 애쓰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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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아무도 태우지 않고
문이 닫히는
엘리베이터처럼
이미 이곳에 들어와 있다
모두의 이름을 부르면서
누구의 이름도 부르지 않는다
이곳은 고통의 원인을 네게서 찾지 않는 세계다
-최정진, '인간의 교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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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허해, 라는 나의 고백에 외려 우울의 이유를 물어 오는 사람들. 텅 빈 천장에서 홀로 목격하는 우주는, 감정적인 현상이라기보다는 거스를 수 없는 어떤 현시 같은 것이었고 내가 거기에 들어가 있는 느낌이 들 때마다 온몸에 오한이 일었다. '공허하다'라고 말을 하면 입안에서 아득하게 멀어지는 공간들. 그 속에서 막연하게 상상했던 순간들은 때로 형태와 목소리를 갖추고 눈앞에 거대하게 서 있고는 했으며 그때마다 나는 꿈꾸었던 것들로부터 또 한 차례 밀려났다. 어디에도 나를 위한 무대는 없었다. 소원을 적은 종이를 태웠다가 소원이 무엇이었는지 잊어버린 연극 속의 주인공처럼 천천히, 다음 대사를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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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진. 2020. 버스에 아는 사람이 탄 것 같다. 문학과지성사.
Background Image : (C) 2019. PIPE 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