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호를 만들자
오전에는 오랜만에 삼성전자로 외근을 나갔다. 일찍 출발했지만 출근시간이라 도로에 차가 많았다. 가만히 앉아 꽉 막힌 도로를 보며 멍 때리면서도 돈을 벌 수 있다니. 외근이 점점 좋아진다. 하지만 같이 간 프로님은 네비를 자꾸 최단시간으로 업데이트하며 전전긍긍하셨다. 나는 속 편한 계약직이라 그럴 필요가 없었지만 점점 불안이 전염되어 빨리 도착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전에 왔을 때는 보안 시스템을 지나갈 필요가 없었는데 오늘은 아니었다. 공항 출국장과 비슷한 보안 검색대를 지나 핸드폰에 카메라 중지 어플을 실행하고 나서야 본사 건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대기업답게 직원수가 많아서 내부도 커다랬다. 드라마에서만 봤던 회사 이미지보다 더 빈틈없고 웅장한 느낌이었다. 엄마 따라 처음 백화점에 온 딸랑구마냥 프로님을 따라가며 눈앞에 펼쳐진 모든 장면들을 눈에 담기 바빴다.
오랜만에 사람 구경을 해서 재미있었다. 이곳에서는 어떤 사람들이 근무할까 궁금했는데, 뭐 그냥 특별할 것 없이 똑같아 보였다. 결국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구나. 아! 방금 한 가지 공통된 특징이 떠올랐다. 글씨체가 모두 정갈했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일지도 모르겠지만 성격이 대체로 깔끔한 것 같았다.
같이 간 직원 모두 일이 금방 끝나서 함께 식사를 했는데, 식사 종류만 해도 무려 다섯 가지가 넘었다. 한식, 양식, 중식, 테이크아웃식, 건강식 등 다양하게 골라먹을 수 있었다. 심지어 무료라고 한다. 맛있는 음식을 매일 공짜로 골라서 먹을 수 있다니, 부러웠다. 내 식욕은 사그라들 줄을 모른다.
본사로 돌아올 때는 출발할 때와는 다른 프로님의 차를 타고 왔다. 내 옆 자리에 앉아계신 프로님으로 가장 친하게 지내서 편안했다. 그래서 요새의 고민이 떠올라 물었다.
보장된 미래 vs 지금의 안녕
누군가에겐 가장 쉬운 밸런스 게임일지 몰라도 내게는 참으로 답을 내리기 어려운 질문이다. 사실 이는 식사시간에 다른 직원분들이 나누던 대화에서 시작된 생각이었다. 머리로는 보장된 미래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마음은 지금의 안녕과 평화를 원한다.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프로님은 엄마가 되면 예전에 비해 안정적인 생활을 추구하게 되므로 보장된 미래가 좋지 않겠냐는 의견이었다. 결혼을 하고 보니 미혼 때와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이었다. 그렇구나. 이런 의견도 있구나. 하지만 여전히 나 스스로는 답을 내릴 수 없었다.
회사에 돌아와 브런치를 켜서 글을 읽었다. (여유가 있을 땐 글을 읽는다. 블로그처럼 사진이 많으면 괜한 눈치가 보이므로 글자가 많은 브런치가 최고다.) 그리고 우연히 발견한 이 글. 03화 일보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 답을 얻었다. 이 글을 통해 내가 내린 결론은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둘러싸여 있는 삶 안에 일이 있어야지 행복한 삶을 향유할 수 있다는 것. 즉, 보장된 미래든 지금의 안녕이든 좋아하는 게 있어야 한다는 것. 그렇다면 우선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가득 만들어야겠다. 요가, 책, 음악, 영화, 새로운 만남, 여행, 그림 그리기, 전시회 구경, 수영, 편지 쓰기, 글 쓰기, 떡볶이 먹기, 강아지 쓰다듬기, 잔디밭에 누워있기, 운전, 자전거 타기, 차 마시기, 새로운 언어 배우기, 목욕탕에 몸 담그기, 좋아하는 향수 뿌리기, 산책, 한여름의 뜨거운 햇살, 사람들의 미소. 벌써 많다! 나의 기호를 더 만들어 즐기며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