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생겼다. 3년 전쯤 정년퇴임을 하셨다고 하니 65세 정년이면 68… 아마도 거의 70이 가까워지고 있는, 그러니까 어디 보자 내 기준으로 30살 많고 남편 기준으로 33살 많고, 아기 기준으로 68살 많은 친구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우리는 텃밭 친구가 되었다.
너무 건강한 겉모습에 아무 생각 없이 적어도 아빠보단 어릴 거라 생각했는데 계산해보고 나니 아빠보다도 나이가 많으시다.
또 한 번 아빠와의 텃밭 추억이 내 마음을 찌르듯 스치고 지나간다. 나의 첫 텃밭 친구는 다름 아닌 우리 아빠였다. 나에게 손으로 자연스럽게 흙을 만지는 법을 알려준 것도, 잘 익은 토마토를 직접 따서 쓱 쓱 바지에 문질러 닦아내고 주저 없이 입에 배어무는 법을 가르 쳐준 것도, 모래놀이가 별 건가 맨손으로 흙속에 박힌 고구마와 감자를 쏙쏙 캐내는 재미를 알려준 것도, 달팽이가 갉아먹고 남기고 간 구멍 뽕뽕 뚫린 쌈채소가 오히려 더 무해한 것임을 알게 된 것도 그 친구 덕분이었다. 그렇게 텃밭 가꾸기를 좋아하던 내 첫 번째 텃밭친구는 이제 더 이상 텃밭 산책조차 어려운 건강상태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 친구를 떠올리면 아프다.
어쨌든 다시 서른 살 많은 두 번째 텃밭 친구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우리가 계약한 텃밭은 농장 주인아저씨가 가지고 있는
커다란, 약 70명에게 분양했다는 땅과는 이백 미터쯤 떨어져 있는 별도의 섬 같은 그런 20평 남짓의 땅이었다. 물론 그 옆으로도 많은 밭이 있었지만 예상컨대 대부분 외지인들의 주말농장이 아닌 주민들의 본놀이터 같은 느낌이었다. 그냥 느낌이 그랬다. 그곳에는 아마추어의 어설픈 냄새가 없었고 무엇보다 모두들 훈장처럼 검게 그을린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모든 걸 말해주는 거다. 주말이 아닌, 매일매일 이곳으로 오시는 분들이 가진 그 포스는 토마토 가지치기가 뭐인지도 모르고 토마토 나무를 주저앉게 만들고, 2m짜리 텃밭용 철봉 지지대를 파는 곳이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다이소에서 파는 가느다란 지지대를 사 와서 어정쩡하게 서있는 초보농부는 감히 흉내도 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 밭의 고수(?)님들과는 한 번씩 정면으로 마주쳤을 때나, 아기가 있어 관심을 보이시는 분 들하고만 간단하게 눈인사를 하기만 했지 친구가 되기에는 너무 레벨차이가 컸다. 마치 세 살짜리 아기와 초6정도의 갭이랄까. 너무 시시해서 같이 놀아주지도 않을 그런 정도의 차이.
그런데 그런 우리에게도 드디어 텃밭 친구가 생겼다. 지지대설치 하랴, 잡초 뽑으랴, 잘 자란 쌈채소 수확 하느라, 일주일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나일론 농부인 우리들을 누군가 너무 반가운 시선으로 쳐다보며 인사를 건네는 게 아닌가.
“아이고, 안녕하세요~~~”
“드디어 뵙네요”
그 짧은 인사 속에는 분명 그간의 기다림이 묻어 있었고, 기다림 속에 묻어둔 궁금증이 어느 정도 해소되어 무척이니 반가움 와 신남이 묻어 있었다.
그건 당연 우리 쪽도 마찬가지였다. 반갑게 인사하는 쪽으로 몸을 틀어 우선 인사는 받고 봤는데 그냥 지나가시는 분인지, 누군지 알 수 없어 눈을 똥그랗게 뜨고 있는 우리에게 우리 10평 텃밭의 바로 옆 10평 텃밭의 주인이라고 스스로 소개하시는 걸 듣고서야 우리도 활짝 웃으며 이내 반가운 마음을 나눌 수 있었다.
호칭은 자연스럽게 ’선생님‘으로 정해졌다. 선생님은 비교적 근처에 사시는데 요즘 아침, 저녁으로 이곳 텃밭에 오는 재미를 보고 계시다고 했다. 일을 다시 소소하게 해 볼까 하다가도 이게 너무 재밌어서 에이 무슨~ 하셨을 정도라고. 은행원으로 일하시다 은퇴하신 지 3년이 지났는데 지금의 생활이 너무 만족스럽다고 하셨고 실제로 그렇게 보였다.
말끔한 개량한복 차림, 선량한 인상, 온화하고 점잖은 말투. 딱 봐도 서른 살 차이 나보이는 자식뻘 아이들이 소꿉놀이 하러 온 것을 알면서도 꼬박꼬박 존대를 하시며 우리 옆에서 손을 걷어붙이고 우리 밭일을 도와주시며 대화를 이어간다. 아침저녁으로 텃밭을 매일같이 돌보고 계시기에 일주일에 한 번으로 벼락치기하는 우리와는 달리 여유로우시다. 머쓱해하며 도움의 손길을 넙쭉 받은 우리는 그렇게 또 한 수 배워 나간다.
듣자 하니 선생님 또한 초보 농부시라고. 그렇다 치기엔 작물들의 건강한 자태가, 그 솜씨가 대단하시다. 이게 다 “작물은 농부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자란다”는 옛말이 여지없이 틀린 말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거겠지 싶었다.
지난 두 달간 일면식이 없던 우리는 첫 만남 이후 약속한 듯 해질 무렵에 그곳에서 만나 오고 가며 대화를 나누는 친구가 되었다.
우리 아이의 이름을 기억해 주고, 다정하게 불러주고 인사해 주고, 우리 텃밭의 엉켜버린 감자 줄기 머리카락을 말끔히 정리해주시기도 하며, 가끔은 목말라 보이는 우리 작물에 친절히 물을 나눠 주시기도 했다. 그 마음에 감사하며 우리 둘은 집에 돌아오는 길에 얘기했다. 다음에 한번 농장 주인아저씨가 만들어놓으신 오두막에서 선생님과 함께 우리가 키운 쌈을 뜯어다 고기를 구워 먹자고.
그렇게 우리는 천천히 친구가 되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