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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망 Feb 05. 2023

조용한 아이도 잘 살아요


퇴근해 집에 오면 저녁을 지어먹고 강아지들과 산책에 나선다.

때로는 혼자, 때로는 남편과 함께.


엊그제 저녁에는 남편과 함께 걸었다.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가 불쑥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가 화제에 올랐다. 보지는 않았지만 한참 잘 나간다는 소식은 들었다. 요즘 K 드라마에 홀딱 빠져있는 직장 동료도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끝나면 '더 글로리' 차례라고 했다.


'더 글로리'가 왕따, 학교 폭력 이야기여서 보기 힘들었다는 말을 들었다. 내가 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왕따'라는 단어가 없었던 것 같아 찾아보니 90년대 생겨난 신조어라고 한다. 그때도 왕따가 있었던 걸까?


이를 계기로 학생일 때의 나를 되돌아보았다. 항상 조용하고 튀지 않아 있는 듯 없는 듯했고 공부를 잘하지도 못하지도 않았으며 친구 관계도 매우 좁았던, 나만의 세상에 살았던 아이. 문득 내가 조금만 더 늦게 태어났더라면 왕따감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말을 남편에게 꺼내자 남편은 "그럼 왕따가 인기남이랑 결혼한 거네." 한다. "뭐야, 진짜 인기남이었어?"라고 물으니 one of the most popular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도대체 왜, 라며 어이없어하는 나에게 어느 한 그룹에 속해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당시 인기 있었던 SF를 좋아했고 운동을 잘했고 음악을 다양하게 들었고, 등등 주절주절 이유를 늘어놓는다.


영국인 남편은 십 대때 부모님을 따라 뉴질랜드로 이민 왔다. 정말 오기 싫었다고 했다. 나는 전학도 한 번 다닌 적 없지만 이해할 수 있었다. 매년 1학기 첫날을 가장 싫어했으니까. 아무튼 한참 사춘기였을 시기에 이민을 왔으니 힘들었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남편은 아이들이 자기 발음을 놀려도 신고 다니던 닥터 마틴을 비웃어도 상관없었다고 했다. 자기가 그 애들보다 더 잘났으니까.


"뉴질랜드니까 가능했던 거야. 여긴 그냥 시골 동네 느낌이잖아." 내 말에 남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20대 초반에 런던에서 살 때가 더 힘들었다, 고 털어놓았다. 런던애들이 북쪽 지방 출신이라고 깔봤던 모양이다.




역시 모든 건 마음먹기 나름인가. 웰링턴 인기남이 런던 찌질이가 되는 게 한순간인 것처럼 왕따가 될 소지가 충분했던 아이도 자라 잘 살고 있다. 여전히 사람들 앞에 나서기를 싫어하고 말은 하는 것보다 듣는 게 편하지만 그래도 문제없이 산다. 게다가 과거(자칭) 인기남과 결혼도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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