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고기를 구울 시간
뉴질랜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과일이나 채소가 종종 있다.
호롱박처럼 생긴 서양배는 흔하지만 한국에서 먹는 동그란 배는 작년에 처음 봤다. 내가 처음 뉴질랜드에 발을 딛었던 2010년과는 다른 모습이다. 사실 2010년에는 홈스테이를 하며 가난하게 살아서 마트에 가서 뭘 제대로 사본 적도 없기는 하다.
중국인 상인들이 많은 선데이 마켓에서나 볼 수 있었던 배추나 무, 청경채도 이제는 마트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다. 마트의 인터내셔널 푸드 섹션도 물품이 다양해져 이제는 라면, 김, 초코파이, 과일 소주 같은 것들도 자주 보인다.
한 때 시내에 막걸리를 파는 주류 상점이 있었는데 판데믹을 겪으며 폐점했다. 너무 아쉽다. 한국 슈퍼에서 웬만한 것들은 살 수 있지만 가격도 문제다. 국제선 비행기가 다니고 큰 도시인 오클랜드에서는 구하지 못하는 게 없는 듯한데 내가 사는 도시 웰링턴은 뉴질랜드의 수도지만 없는 게 너무 많다.
오클랜드에는 있는 한국식 중국집, 즉석 떡볶이집, 주점, 순댓국집, 떡집, 한국식 빵집 등은 여기에는 없다. 웰링턴의 한국 슈퍼에 가면 일주일에 한 번 빵이 들어온다. 오클랜드 한국 빵집에서 배달 오는 건데 단팥빵, 소보루빵, 슈크림빵뿐인데도 잘 팔린다. 몇 개 들어오지도 않지만 나는 항상 가격표를 보고 들었다 놨다를 반복하다 내려놓곤 한다.
이 글을 쓰면서 뉴질랜드에 사는 동안 못 먹어본 계절 과일이나 채소가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왜 계절 과일인가 하면 일 년이나 이 년에 한 번 한국에 가면 그래도 웬만한 건 다 먹을 수 있는데(갈 때마다 항상 먹고 싶은 걸 생각해 놨다가 먹으려고 해도 돌아올 때면 꼭 못 먹은 게 생각나 아쉽긴 하지만) 한 계절에만 나오는 것들은 구경도 못할 때가 많다.
뉴질랜드에 오고 나서 한국 여름을 겪어본 적이 없다. 지금 가면 과연 견딜 수 있을까 싶다. 높은 온도는 둘째치고 습도는 정말 견디기 힘들 것 같다. 여름에 안 가다 보니 참외를 십 년 넘게 먹지 못했다. 여긴 참외가 없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쑥이나 봄동, 달래 같은 봄나물들도 맛본 지 오래다.
깻잎은 한국 사람들이 집에서 키운다는 소리를 들은 적은 있었지만 파는 곳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 일 년 여 전에 오클랜드에 사는 아는 동생이 카톡을 보내왔다.
'언니, 웰링턴도 한국슈퍼에서 한국 채소 모종 팔아요?'
'여긴 봄마다 팔거든요.'
'청양고추랑 깻잎 모종 보내드릴까요?'
'한국음식 만들 때 청양 고추 좀만 넣어도 맛이 확 변하더라고요.'
오클랜드 슈퍼에서는 깻잎과 청양고추 말고도 부추와 아삭이 고추 모종까지 판단다! 삶의 질이 이렇게 다를 수가. 역시 사람은 큰 물에서 놀아야 하나 보다.
나보다 많이 어린 동생이라 막상 보내달라고 하기가 좀 뻘쭘했지만 깻잎과 청양고추라니 마다할 수가 없었다. 동생은 모종 네 개 씩으로 보내왔다. 어찌나 꼼꼼히 싸서 보냈는지 택배로 하나도 상하지 않고 잘 도착했다. 원래 뭐 심고 키우고 하는 재주가 없는 나지만 성의가 너무 고마워서 잘 키워봐야지 다짐하며 하나하나 정성 들여 심었다. 매일 물을 주며 지켜보다 보니 어느새 한 면은 초록색, 한 면은 보라색인 작은 깻잎들이 점점 커지고 조그마한 청양고추들이 대롱대롱 달리기 시작했다.
깻잎은 해만 잘 들어도 잘 자란다는 엄마의 말이 맞았다. 아주 무럭무럭 잘 자랐다. 반면, 청양고추는 실패. 뭘 잘못했는지는 모르지만 자라다만 고추 몇 개를 남기고 날씨가 선선해지면서 시들시들 죽어버렸다.
깻잎은 다시 심지 않아도 씨가 떨어져 이듬해 다시 난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 해 이사를 하게 되어 씨를 최대한 많이 받아 말리고 털어서 이사할 때 가져왔다. 깻잎씨를 심고 조마조마 마음을 졸이며 며칠이 지나자 작은 떡잎 두 개가 나오고 곧 아주 쪼끄만 깻잎 모양의 잎사귀가 돋아났다. 살짝 뒤집어보니 아래쪽이 보라색이다. 이런 게 생명의 신비인가. 그 자그마한 잎들이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럽던지!
이제 깻잎이 다 자란 것 같다. 깻잎 장아찌를 만들 정도의 양은 나오지 않을 것 같고, 고기를 구워 함께 먹을 정도는 될 것 같다. 조금 남겨서 깻잎 떡볶이도 해 먹어야지, 즐거운 상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