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대충 살고 싶은 사람의 고민
나는 평생 옷을 잘 입는 사람이 아니었고 지금도 그렇다.
여러 가지 문제가 있지만 체형이 가장 큰 문제이고(머리가 크고 어깨가 좁고 키가 작고 팔다리가 짧고 등등) 체형이 이 모양이니 이것저것 입어보고 시도해봐야 하는데 쇼핑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도 심각한 문제다.
타고난 결정장애로 옷이나 신발을 사러가도 이리저리 재기만 하다가 빈 손으로 돌아오기 일쑤다. 한국에 있을 땐 엄마가 유일한 쇼핑 친구였다. 다른 사람들처럼 친구랑 가서 이것저것 입어보고 하면 좋을 텐데 내가 결정을 너무 못하니 누구와 함께 가기가 어려웠다. 미안하고 민망해서.
그러다 뉴질랜드에 왔는데 여기는 뭐 패션 센스는 둘째치고 머리나 감고 다니면 다행이다 싶은 사람들이 보였다. 목이 다 늘어난 티셔츠나 구멍 난 스웨터도 아무렇지 않게 입고 다닌다.
내가 아는 대학 교수 하나는 영국 출신으로 MIT에서 학위를 딴 사람인데 사시사철 카고 반바지를 입고 맨발로 다닌다. 학생들에게 친절하고 강의가 재미있어서 그의 강의실은 늘 빈자리가 없을 정도지만 그가 옷차림에 신경 쓰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항상 맨발로 다니는 그의 발바닥을 한 번 우연히 본 적이 있는데 호빗 발이 그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거칠고 두꺼웠다.
옷을 잘 입지 못하는 나도 예전엔 제대로 격식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밖에 나갈 땐 화장을 했고 옷도 갖춰 입었고 가방도 바꿔 메고 신발도 옷차림에 맞춰 신었다. 다들 그렇게 하니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튀어 보이고 남들 입에 오르내리게 되니까.
얼마 전 남편과 구경 삼아 가구점에 갔는데 한국인 엄마와 두 아이가 침대와 다른 가구들을 구입하고 있었다. 남편이 그들을 보고 나에게 '너도 전에는 한국 스타일이었는데 지금은 완전 뉴질랜드 스타일'이라고 했다. 아이들의 엄마는 트렌디한 원피스에 작은 명품 가방을 들고 오래 걸으면 발이 아플 것 같은 샌들을 신었다. 나는 보풀이 나고 물 빠진 집업 점퍼에 무릎 나온 트레이닝 바지, 운동화, 이 정도면 나름 선방했다 싶지만 온몸에 고양이털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그들을 조용히 지나쳐 밖으로 나왔다.
대학에서 일하는 나는 옷차림이 꽤 자유롭다. 개중엔 크롭탑을 입거나 쪼리를 신고 다니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래도 나는 그 정도는 아니고 보통은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으로 다닌다. 재킷은 행사가 있을 때만, 스커트는 거의 입지 않아서 입기라도 하면 다들 한 마디씩 하는 통에 더 입지 않게 되었다.
전에는 옷차림 따위 신경 쓰지 않는 남자들이 많은 부서에서 일해서 정말 편했는데 일 년 여전 옮긴 지금 직장은 여자가 많아서 여러 가지로 어렵다. 다들 서로의 옷차림과 액세서리를 칭찬하고 어디에서 얼마를 주고 샀는지 목소리를 높일 때면 나는 그냥 입을 다문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고 굳게 믿으며. 그래도 귀로는 그들의 대화가 들려오니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편한 옷이 좋고 남들 신경 안 써도 돼서 뉴질랜드 스타일로 적응하고 살았는데 이제 와서 이런 고민에 빠지다니 나 스스로에게 실망이다. 그냥 나는 나, 너는 너, 로 살기가 왜 이리 어려운 건지.
내 생각과 태도는 아직도 한국과 뉴질랜드 사이 태평양 어딘가에 있는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