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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망 May 03. 2023

무대 공포증

극복하고 싶지만 노력하고 싶지 않은 어중간한 마음


나는 어릴 때부터 있는 듯 없는 듯한 아이였다. 누가 시키기 전에는 손을 들어 대답을 한다거나 발표를 하는 일 따위는 있을 수도 없었다. 친구 관계도 아주 좁아서 반 친구들 중에 한 학년이 지나도록 말도 해보지 않은 아이들도 있었다. 한 학기쯤 지나서 겨우 말을 트게 됐을 때 너 생각했던 거랑은 참 다르다, 는 말을 들어본 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 성격이 싫어 노력을 해서 고치는 사람들도 있더라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성격은 싫었을지언정 고칠 노력을 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 어쩌면 어떻게 해야 고칠 수 있는지조차 몰랐을지도. 아무튼 그냥 그렇게 사는 게 편했다.


초등학교 때 기억은 별로 없지만 중고등학교 때는 혼자 걸을 때면 항상 이어폰을 끼고 다녔다. 음악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등하교 시간에 친하지도 않은 아이들과 이야기를 해야 하는 상황을 피하게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어폰을 끼고 땅을 보고 걸었다.


학년이 바뀌는 게 너무 싫었다. 친한 친구들과 헤어지고 새로운 아이들을 사귀는 일이 즐겁지 않았다. 자기소개 시간도 지옥이었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였다. 연애를 하며 놀기 바빠 학교도 잘 안 갔지만 가도 절대 나서지 않았다. 교수님들은 나라는 학생이 있는 줄도 몰랐을 거다. 그저 다른 친구들을 따라 강의를 신청했다. 그렇게 그럭저럭 살았다. 여전히 작은 관계도를 그리고 친한 사람들과 깊은 이야기를 나누며 그렇게 살았다.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나이가 들면서 이런 불편한 성격을 감추며 사는 방법을 조금 터득했다. 살다 보니 세상엔 더 무섭고 걱정할 게 많아서였을까. 여전히 남들 앞에 나서는 일은 싫지만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에는 빠삭하다. 질문을 많이 하고 사람들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귀를 기울이면 된다. 


일을 할 때도 behind the scene이 좋고, 미팅을 할 때도 절대 나서지 않고 꼭 해야 할 말만 한다. 그래도 뉴질랜드에서 살다 보면 피할 수 없는 mingling에 이제는 어느 정도 적응을 해서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 말을 걸 수도 있게 되긴 했다. 물론 질문하는 방식으로.


최근 함께 일을 해 온 한 대사관에서 연 행사에서 축사 비슷한 걸 하게 됐다. 원래는 직장 상사가 참석해야 하는 자리였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고사하게 되었고 나에게 그 일이 떠넘겨졌다. 작년에 이어 두 번째 있는 일이었다.




자존심은 있어 할 수 있다고는 했지만 진짜 싫었다. 죽기보다 하기 싫은 게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건데 단상에 서서 영어로 말을 한다는 게 너무너무 부담스러웠다. 작년엔 단상에 오르기 전 날까지 고민했다. 코로나에 걸렸다고 할까. 진짜, 진심으로 고민했다.


그래도 작년보다는 훨씬 작은 행사였다. 하지만 한 나라의 대사 다음에 나가야 하는 자리라 부담스러웠다. ChatGPT에게 이삼 분 짜리 스피치를 써달라고 했다. 물론 많이 고쳐야 했지만 그래도 도움이 됐다. 그리고 며칠 동안 입으로 우물우물 연습을 했다. 막판엔 써놓은 걸 보지 않고도 말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잠자리에 들 때마다 잠재의식에게 말했다. 나는 침착하고 자신감으로 충만합니다. 어느 책에서 보니 그렇게 잠재의식에게 확언을 하라고 하더라. 실제로 도움이 되었는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마음이 그렇게 불안하지는 않았다. 단상에 오르기 오 분 전, 머리가 어질어질,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숨을 훅 들이쉬고 천천히 여러 번에 나누어 내쉬었다. 이것도 어느 책에서 본 거다. 긴장을 없애는 방법.


막상 단상에 올라가니 사람들과 눈을 맞추며 천천히 말할 여유는 없어져서 줄줄이 읽고 끝냈다. 끝나니 살 것 같았다. 행사를 마치고 네트워킹하는 시간이 있었지만 힘이 쭉 빠져 집에 일이 있다 하고 일찌감치 그곳을 빠져나왔다.




더 잘 나가려면, 더 높은 자리에 오르려면, 이런 상황에 익숙해져야 한다. 못해도 잘하는 척, 세상에 두려움이란 없는 듯이. 그런데 나는 그런 재주가 없음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해야 하는 일이라면 할 수는 있지만 하기 싫은 건 어쩔 수 없다. 하기 싫은 일도 하다 보면 는다고 하지만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주위에서 보면 나 같은 성격이었지만 열심히 노력해 바꾼, 혹은 바꾸려는 사람들을 종종 본다. 예전 직장 동료도 그랬다. 정말 순간순간을 열심히 사는 친구로, 그는 나보다 훨씬 어리지만 열정에 불타서 일을 했고 많은 사람들과 교류했다. 하지만 그의 천성은 그런 게 아니어서 그를 가만히 보고 있자면 정말 애쓰고 있구나 싶었다. 대단하다는 생각과 안쓰러운 마음이 교차했다.


외향적인 성격을 타고난 사람들이 부럽긴 하다. 남들 앞에서 주눅 들지 않고 나설 수 있는 사람들. 나도 그런 성격이었다면 좋았겠지만 그렇지 못하니 또 그렇게 만족하고 살아야겠지.


부러우면 지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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