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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망 May 19. 2023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

설거지 잘하는 법


나에게 설거지란 하기 싫은 것. 하지만 한다면 꼼꼼히 뽀득뽀득해야 하는 것.


엄마는 나에게 설거지를 시키지 않았다. 당신이 힘들게 고생하며 살아서인지 우리에게는 좋은 것만 주려고 했다. 아주 가끔 작은 심부름을 시키는 것 외에는 설거지도, 청소도, 집안일은 시킨 적이 없다. 오빠나 나나 마찬가지였다. 나이가 들어 오빠가 결혼을 하고 새언니가 들어오고서야 새언니와 같이 설거지를 하곤 했다.


엄마는 어릴 때부터 결벽증이 있었다고 한다. 그걸 스스로 인식하고 고치려고 엄청 노력했다고. 하지만 엄마가 살림하는 걸 보면 참 피곤하게 산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나에게 설거지란 팔꿈치까지 오는 진분홍색 고무장갑을 끼고 수세미에 퐁퐁을 쭉 짜서 하얀 거품을 팍팍 내, 있는 힘껏 그릇을 빡빡 닦는 것, 그리고 수도꼭지에서 콸콸 쏟아져 나오는 물에 한참 헹구는 것.




뉴질랜드에 온 지 얼마 안 돼 홈스테이에 살 때였다. 나와 몇몇 학생들은 저녁을 먹고 나면 한 번씩 돌아가며 설거지를 했는데 하루는 설거지를 하는 내 등 뒤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뭔가 좋지 않은 기운이 스멀스멀 몰려오는 것 같았달까.


홈스테이 주인 할머니가 내 뒤에서 지켜보고 있다가 역시나 한 마디 했다. 뭐 하는 거냐며. 할머니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설거지하는 법을 가르쳐주겠다며 개수대 앞에 서 있는 나를 몸으로 밀어냈다.


할머니는 개수대 하수구 구멍을 막고 뜨거운 물을 받더니 거기에 주방 세제를 조금 풀었다. 그 물에 접시를 하나씩 넣어 손잡이 달린 솔로 슥슥 문지르고는 물에서 꺼내 거품이 남아있는 채로 개수대 옆에 세워놓았다. 그렇게 몇 번 되풀이하더니 이번에는 냄비를 넣어 같은 방식으로 냄비 안을 슥슥 문지르고는 꺼내어 접시들 옆에 엎어 놓았다.


개수대의 물을 빼길래 이제 헹굴 차례구나 했는데 그대로 주방 수건을 집어 들더니 접시들을 닦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접시와 냄비의 물기를 닦는 내내 물을 아껴야 한다며 잔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나에게는 문화 충격이었다. 설거지를 그런 식으로 하다니. 물을 아끼는 건 좋지만 그릇에 남은 세제 찌꺼기는 어찌 되는지, 그냥 그렇게 해도 몸에 해롭지는 않은지, 많은 질문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묻지 못했다. 우선 내 영어실력이 별로였고 할머니는 무서웠다.


아주 나중에야 영국인들이 설거지를 그렇게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영국인이 많이 이주한 호주나 뉴질랜드에서도 그냥 그렇게 이어가는 사람들이 많다.




영국인인 남편에게 물었다. 이유가 무언지. 자기도 모른다고 했다. 자기 할머니도 그렇게 했고 엄마도 그렇게 했지만 아무 문제도 없었다고 한다. 사실, 이 질문을 하자마자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나온 대답은 '나는 헹구는데'였다. 내가 또 잔소리라도 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솔직히 남편의 설거지는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다. 수세미를 쓰지 않고 손잡이 달린 솔을 쓰니 컵도 안 쪽만 닦고 냄비나 프라이팬도 안 쪽만 닦는다. 숟가락 같은 것들은 손잡이를 잡고 입을 대는 부분만 닦으니 가끔 닦아놓은 숟가락이나 포크 손잡이에 지문이 남아있기도 한다.


십 년 넘게 잔소리를 했는데도 고쳐지지 않는다. 그러면서 눈이 안 좋아 안 보이는 건데 내가 자기 '장애'를 무시한다며 투덜댄다. 그래서 우리는 웬만하면 식기 세척기를 쓴다. 식기 세척기가 손 설거지보다 물도 덜 든다고 한다. 물론 전기를 쓰긴 하지만.


엄마는 아직도 물을 콸콸 틀어놓고 설거지를 한다. 가끔 너무하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다. 이제는 내 설거지도 엄마의 설거지와 다르다.


시작은 같았지만 끝은 다르다. 그렇게 내 관점이나 기준도, 사는 방식도 달라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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