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밝아진 세상 속으로

결(結) - 다시 나를 세우다

by 게으른 개미

그렇게 전쟁 같던 17개월이 흘렀다.
실제로 피 튀기는 총성은 없었지만, 내 하루하루는 말 그대로 사투(死鬪)였다.


그리고 마침내 찾아온 11일간의 마지막 본국 휴가.

인천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고국의 숨결에 괜히 감격했고, 집에서는 내가 좋아하는

과자를 쉼 없이먹었다. 입 안 가득 강냉이를 넣고 한껏 씹을 땐, 입꼬리 끝에 슬며시

미소가 걸렸다.


그러다가 정신 차려보니 다시 현장으로 복귀할 날이 돌아왔다.


그동안 긴 터널을 지나온 기분이었다.
그 터널은 끝도 보이지 않을 만큼 캄캄했고, 한동안은 그 어둠만이 내 인생인

줄 알았다.하지만 아주 멀리서, 한 점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 이 시간을 그냥 묻어버려도 되나?'

사실, 아무것도 남기지 않으면… 나중에 누가 사우디 현장 부임 생활에 대해 물어봤

을 때 "더웠어. 공기 안 좋아… 가지 마." 이러고 끝날 게 뻔하지 않나.


너무 억울했다. 내가 어떻게 버텼는가!

모래를 머리에 이고 일한 것도 아닌데, 진짜 모래가 머리에서 나올 것 같은 그런 하루들

이었는데!!


그래서 기록을 남기기로 했다.

‘다시 써보자’라고 마음먹는 순간, 주변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는 익숙해서

눈길도 주지 않던 건물들, 표지판, 사람들의 말투와 표정까지 하나하나 새롭게 느껴졌다.

마치 처음 사우디에 왔던 것처럼, 나는 사진을 찍고, 메모를 하고, 문득 떠오른 생각들을

쌓아가기 시작했다.


그때 깨달았다.
사람은 정말 마음먹은 대로 세상을 보게 되는구나.
어제는 그냥 스쳐 지나치던 것들이 오늘은 눈에 밟히고,
어제는 벅차기만 했던 하루가 오늘은 ‘그래도 견뎠다’는 마음으로 바뀌고,
언젠가는 그 기억조차 담담히 이야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실 그동안은 돌아보는 게 두려웠다.
'내가 이걸 왜 하고 있지?'라고 의문을 품으며 달려온 길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무너질까

봐 애써 앞만 보고 걸었다. 그런데 이제는 조금은 돌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다시 돌아보기 시작한 건 어쩌면 긴 터널 끝에 다다랐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정확히는 아직 빠져나온 건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출구 표시등은 보이는 정도?


산산이 부서졌던 마음의 조각들을 하나씩 찾아 다시 제자리에 놓으며 흩어진 기억을

되살려간다.

[사진 1]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치히로처럼 끝내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와, 언젠가는 담담한 마음으로 사막에서 지나온 날을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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