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起) - 낯선 세계에 발을 딛다
점심시간이 끝나가는 오후 1시 무렵, 사내 메신저로 들어온 짧은 안부 글에서 파트장님의 낙천적인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안녕하십니까, 파트장님. 현장에서 고생 많으시죠? 잘 지내시나요?"
"나야 늘 잘 지내지~^^"
특별할 것 전혀 없는 직장 상사와 부하 직원 간의 대화였지만, 이날은 유독 파트장님의 평범한 안부 인사에서 뭔가 다른 의도가 느껴졌다.
"사실, 현장에 자재 입고 상황이 너무 critical해서 OOO 씨가 한 3개월만 사우디에 와서 제작 업체들 expediting 좀 해줬으면 해서, 상무님 구두 승인도 이미 내가 받아놨고."
역시, 파트장님께서 파고 싶으신 말은 따로 있었다.
나는 건설회사의 해외 플랜트 분야에서 일을 하고 있다. 2021년부터는 사우디아라비아 J 프로젝트 자재 조달을 담당하고 있다. 내게 연락을 주신 파트장님은 조달의 후속 공정인 시공 담당이시다.
한 번 파견을 나가면 언제 한국에 복귀할지 모르고 주 6일, 60시간 이상의 고된 노동에 가족과 떨어져 지내며 고생해야 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직원들은 해외 현장 근무를 싫어한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중동에서도 매우 보수적인 이슬람 국가로 돼지고기는 물론이고 음주가 아예 금지 되어있다. 게다가 프로젝트 현장이 속세와 단절된 사막 한가운데 위치해 있다보니 기피 대상 1순위며
'니가 가라 사우디'가 되어버린다.
"하하하, 너무 갑작스러운 말씀을 하셔서... 제가 당장 답변은 못 드리겠고요... 좀 생각해 보고 말씀드려도 될까요? 1주일 안에는 답변드리겠습니다."
"응, 그래. 너무 부담 갖지 마. 지금 조달 담당자가 현장에 오면 업무에 많이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해서 제안한 거니까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답변 줘요 ^^"
타 부서 파트장님으로부터 현장 근무를 제안받았다는 사실에 갑자기 졸음이 확 달아났다. 가기 싫으면 안 간다고 말씀드리면 될 것을 괜히 심장이 두근거렸다.
'가야 되나? 말아야 되나?상무님께 먼저 승인을 구하신 건 또 뭐지? 그 뜨거운 사막 한가운데를 나보고 오라고??'
회사 생활을 하면서 해외 파견 근무 로망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미주나 유럽을 기대했었지 중동은 꿈에도 상상하지 않았었다. 3일 정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혼자 고민하며 현장에 미리 가 있는 동료들에게 슬쩍 현지 상황이나 생활을 물어보기도 했다.
"간다, 가지 않는다. 간다, 가지 않는다." 마음속에서 수 백 개의 꽃잎을 번갈아 떨어뜨렸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있지 않는가.
남들이 가지 않는 길에 괜히 모험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이런 선택을 해서 고생을 하고 있나' 자책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 희열과 성취감을 느끼는 부류들. ‘기회는 평범한 얼굴을 하고 찾아온다’는 말이 문뜩 떠오르며 이상하게도 두렵고 떨리는 마음 앞에 묘한 기대감이 섞여 들었다.
이번이 아니면 지역에 상관없이 해외 근무를 할 기회는 없을 것 같았고 인간으로서 직장인으로서 한 단계 도약을 위해 왠지 이 제안을 받아들여야 될 것 만 같은 이끌림이 있었다.
며칠 후 나는 인사팀으로부터 해외 현장 부임을 위한 수속이 진행되고 있음을 알리는 안내 메일을 받았다.
2023년 11월 초, 돌아올 날에 대한 기약도 없이 사우디아라비아로 떠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