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기름진 계약, 거친 현실
사우디 A社가 발주처인 프로젝트를 사우디 현지 업체들과 함께 수행한다는 건 손발이 묶이고, 눈까지 가려진 채 100미터 트랙 위에 내던져지는 것과 같다. 출발 신호도 없이 시작되고, 목표도 명확하지 않다.
단 하나 분명한 규칙은 — 10초 안에 완주하지 못하면 매 초마다 채찍이 날아든다는 것. 제한된 권한 속에서 과도한 책임을 감수하는 구조에 놓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규칙이 부당하다고 말해도, 그건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하다.누구도 그것이 잘못됐다고 말해주지 않는다.
정해진 기준이나 절차 없이 오직 ‘성과’만을 요구하는 환경은, 프로젝트 리스크를 외국 파트너에게 전가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실패의 근본 원인이 구조적 문제에 있음에도, 발주처는 이를 단순히 수행사의 역량 부족에서 비롯된 ‘성과 저하’로 해석하며 책임을 국내 EPC Contractor(건설 회사)에게 떠넘긴다.
그러나 문제는 단순한 역량의 문제가 아니다.
계약 구조 자체가 EPC Contractor에게 과도한 책임과 리스크를 떠안게끔 설계되어 있다는 데 있다.
발주처는 공정 지연이나 설계 변경, 책임 회피 등 다양한 국면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도록 유리한 계약 조건을 설정하고, 실제로 이를 전략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국내 EPC Contractor들은 협상에서 주도권을 확보하지 못한 채, 불리한 계약 조건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 발주처는 이 취약성을 정확히 알고 있고, 이를 바탕으로 과업 범위 확대와 비용 전가를 일상적으로 요구한다. 그 결과, EPC Contractor는 수익성 악화, 일정 리스크 증가, 과도한 변경 대응 등의 부담을 지속적으로 떠안는다.
이러한 구조적 불균형은 단지 계약상의 문제가 아니라, 조직 전반에 퍼져 있는 권위주의적 태도와도 맞물려 있다. 이곳에서 마주한 권위주의는 단순한 조직 문화의 문제가 아니다.
“내가 누군지 밝히지 않고도 명령할 수 있다”는 착각,그리고 실패의 책임을 타인에게 전가하는 태도는 언제나 함께 작동한다. 무례한 말투, 지시형 언어, 인사조차 생략된 요청들. 이러한 소통 방식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반복된다. 상호 존중이라는 기본 원칙이 자주 무시된다.
어쩌면, 공자조차도 이곳에서는 덕을 포기하고 주먹을 들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