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Cookie) 제 3호

My Forever Fairy: Britney Spears

by 게으른 개미

팝송에 빠지기 시작한 이후, 현실의 나는 교복을 입고 등교하는 한국의 평범한 중학생이었지만 머릿속의 나는 늘 미국 어딘가를 떠돌았다. MTV를 보면서도 공부를 완전히 놓을 수는 없어서 시청 시간을 정해 두었는데, 그 제한된 시간 속에서도 유난히 자주 마주치게 되는 뮤직비디오가 있었다.


처음 화면을 가득 채운 얼굴은 예뻤지만 눈이 너무 큰 것 같기도 했고, 어딘가 호랑이처럼 강해 보였다. 성숙한 외모 탓인지 처음에는 호감이라기보다는 약간의 거리감이 먼저 들었다. 그래서 무심하게 채널을 돌려버리곤 했다. 그런데 오후에도, 밤에도, 그 영상은 계속 반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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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저 노래가 뭐길래 이렇게 자주 틀어주는 걸까.’ 어느 날은 그냥 끝까지 보자는 마음으로 영상을 따라갔다.


<...Baby One More Time> (*1) 뮤직비디오는 미국의 어느 학교를 배경으로 한다. 따분하다는 듯이 수업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학생, 공책 위에서 연필을 까딱이며 벽에 걸린 시계 초침만 바라보다가 요란하게 울리는 벨소리와 함께 학생들이 교실에서 쏟아져나온다.(*2)


복도에 늘어선 철제 캐비닛(한국은 교실 뒤편에 나무 캐비닛이 있었다), 넓어 보이는 실내 체육관(한국은 모래 운동장이었다), 그리고 각기 다른 머리 모양의 학생들(한국에는 두발 제한이 있었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내가 처음 마주한 미국 학교의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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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loneliness is killing me”라는 조금은 도발적이면서도 장난기 어린 가사와 함께 중간중간 등장하는 군무에 화면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Hit me baby one more time.” 마지막 후렴에서 브리트니는 회심의 앞발차기를 하고 그 동작과 동시에 다시 벨이 울리자 학생들은 황급히 교실로 돌아간다. 이후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브리트니의 얼굴로 뮤직비디오는 끝이 나는데, 이 장면은 오래 여운으로 남았다.


이날을 기점으로 나는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팬이 되었다. 세상에서 제일 예쁜 언니이자, 내 마음속의 요정으로 저장했다.(*3) 독특한 보컬에 키가 크지 않아도 균형 잡힌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춤은 당시의 나에게 완벽한 충격이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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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개월째 <...Baby One More Time>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는데 <You Drive Me Crazy>와 <Sometimes>라는 곡이 차례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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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 Drive Me Crazy> 에서 브리트니는 댄스 클럽의 웨이트리스로 등장한다.

처음에는 그저 평범한 아르바이트생처럼 보인다. 그런데 음악이 흐르기 시작하면 상황이 순식간에 달라진다. 트레이를 내려놓고 춤을 추기 시작한다. 그리고 어느새 초록색 크롭톱에 검정 바지 차림으로 분위기를 완전히 바꿔놓는다. 클럽 안은 점점 열기로 가득 차고, 브리트니는 다른 웨이트리스들과 함께 단체 군무를 춘다. 무대 위에는 커다란 ‘CRAZY’ 네온 사인이 켜지고, 화면 전체가 특유의 틴 팝 에너지로 들끓는다. 설레서 미칠 것 같은 10대의 감정, 가만히 서 있질 못하는 마음을 (*5)그대로 춤으로 표현하는 것 같았다. 이 영상 속 브리트니는 유난히 쾌활하고, 또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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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metimes> 영상은 햇빛이 부서지는 말리부 해변(*6)에서 시작된다. 브리트니는 망원경 너머로 짝사랑하는 남자를 바라본다. 그는 강아지를 데리고 해변을 걷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웃고 있지만, 브리트니는 그에게 쉽게 다가가지 못한다. 좋아하는 마음은 분명한데, 한 발짝이 늘 어렵다.


흰색 의상을 입고 부두 위에서 추는 군무, 해변 잔디에 앉아 있는 모습, 자동차 옆에서 혼자 생각에 잠긴 장면, 혼자서 분홍색 공을 가지고 노는 모습까지. 영상 속 브리트니는 줄곧 망설이고, 기다리고, 마음을 숨긴다. 하지만 후반부에 이르러서야 도망치지 않고, 마침내 그에게 다가가 함께 서는 장면이 나온다. 아주 작지만 분명한 용기의 순간이다.


<You Drive Me Crazy> 감정을 터뜨리는 춤의 에너지라면, <Sometimes> 는 말하지 못한 마음의 떨림이다. 강렬함과 수줍음. 무대 위에서는 한없이 반짝이다가도,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한없이 조심스러워지는 그 대조적인 모습에 다시 한 번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매력에 빠졌다. 그리고 열혈 팬으로서, 한 곡이라도 놓칠세라 1집 수록곡들을 수백 번씩 반복해 들으며 섭렵해 나갔다. 그 앨범의 트랙들을 순서대로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한 편의 청춘 로맨스 성장 소설을 읽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7)


어느덧 2집 <Oops!… I Did It Again>(*8)이 나왔을 때, 빨간 우주복(내가 빨간색 좋아하는 걸 어떻게 알고!)을 입고 뮤직비디오에서 등장한 브리트니는 또 한 번 나를 사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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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의 배경은 화성이었고, 지구에서 온 탐험가가 우연히 흙바닥 속에 파묻힌 오래된 사진을 발견하며 브리트니를 마주하는 설정이었다. ‘Oops’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싶었다. 영어 같기도 하고 왠지 영어 같지 않기도 해서 너무 재미있었다. 다음 날 학교에서 짝꿍에게 이 단어를 읽어보라고 하며 키득거리던 기억도 있다.


나는 이제 가수 이전에, 인간으로서의 브리트니 스피어스가 궁금해졌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녀에 대한 정보를 찾기 시작했다. 브리트니는 미시시피(Mississippi)주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루이지애나 (Louisiana)주 켄트우드(Kentwood)로 이주했다. 루이지애나주는 미국에서도 가구 소득이 낮은 편에 속하는 지역이다. 어머니는 교사였지만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는 않았고, 그럼에도 네 살 무렵부터 춤을 배우게 하고 체조를 가르쳤다는 점에서 어머니가 딸의 재능을 일찌감치 알아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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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트니는 학창 시절 할머니의 생선가게 일을 도왔다고 한다. 중학생 무렵 첫 데이트를 나갔을 때도 온몸에 생선 냄새가 배어 있었다는 이야기를 웃으며 털어놓은 적이 있는데, 부모님이 주는 용돈으로 학교를 다니며 공부만 하던 나에게 그 에피소드는 괜히 마음이 짠해졌다.


그녀는 학업 성적도 나쁘지 않았고, 스스로를 “Do my own things” 유형이라고 말하곤 했다. 혼자 자기 일을 하는 성격이었다는 그 한마디가 마음에 닿았다. 반항이나 방황 대신, 좋아하는 것에 몰입하며 버티던 내 사춘기와 어딘가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노래 밖에서 본 브리트니는 놀랄 만큼 천진난만한 사람이었다. 사랑스러운 말투와 과장되지 않은 제스처, 입이 귀에 걸릴 만큼 환하게 웃는 얼굴. ‘저렇게 유명해도 저렇게 웃을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영상에서는 어린 시절 친구와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놀다가 poor를 ‘푸얼’이라고 발음했다가 사투리를 쓴다며 놀림을 받는 모습이 나온 적도 있다. 브리트니는 친구와 함께 박장대소했고, 그 꾸밈없는 웃음은 묘하게 마음을 놓이게 했다. 저렇게 웃는 사람이 내 옆에 있다면 세상이 조금 덜 무섭게 느껴지질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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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브리트니처럼 밝고 사랑스러운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그녀의 나라인 미국에 꼭 가보고 싶었다. 그렇다면 영어는 당연히 잘 해야겠지? 미국에 가려면 공부를 잘 해야겠지? - 이런 생각들이 꼬리를 물며 자연스럽게 학업의 동기가 되었다. 그 시절 사춘기다운 방황이 거의 없었던 이유도 어쩌면 이런 몰입 때문이었을 것이다.(*9)


그리고 훗날 그녀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았다.

그 흔들림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대중 앞에 놓인 삶이 얼마나 쉽게 소모되는지를 보여주었다. 양육권 분쟁과 사생활의 붕괴, 가족과의 불화, 강제적인 정신 치료와 관리의 시간들. 전세계적인 스타가 되어 부와 명성을 모두 거머쥔 그녀였지만, 너무 젊은 나이에 엄마가 되고, 스타로 살아야 했던 한 사람의 버거운 삶의 무게로 느껴졌다. 나는 이런 모습에 실망하기보다는 안타까움이 먼저였다. 가족과 돈, 책임과 기대가 한 사람에게 과도하게 얽힐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그녀의 삶을 통해 보았기 때문이다. 훗날 그녀의 변호사가 주변에 직업을 가진 사람이 없었고 모두가 브리트니의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다는 인터뷰를 보며 그 안타까움은 더 분명해졌다.


시간이 지나 예전의 그녀의 모습은 모두 사라져버렸다는 말을 듣지만 내가 마음속에 남겨둔 브리트니는 변하지 않았다. 누구보다 순수하고 환하게 웃던 사람. 노래와 춤, 웃음과 목소리로 내 시선을 태평양 건너의 나라로 이끌어주던 사람. 루이지애나의 작은 마을에서 자란 아이가 전 세계적인 가수가 되는 모습을 보며, 나 역시 지금 있는 자리에서 조금은 더 멀리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꿈을 처음 품게 해준 사람이었다.


그래서 브리트니 스피어스는 내게 단순한 팝스타가 아니다. 더 큰 꿈을 상상하게 했고, 어떤 시절을 버티게 해주었으며, 내 마음 속 영원한 요정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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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umbs

(*1) 데뷔곡〈...Baby One More Time〉(1998)은 전 세계 20개국 이상에서 1위를 차지하며, 역사상 가장 많이 판매된 10대 가수의 데뷔 싱글로 기록된 기념비적 히트곡이다. 미국 빌보드 핫 100 1위, 영국 싱글 차트 1위를 달성했고, 동명의 데뷔 앨범은 전 세계적으로 약 2,500만 장이 판매되었다.


(*2) 뮤직비디오 초반 책상에 앉아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벽시계만 쳐다보며 교실 밖으로 나갈 생각만 하고 있는 여학생과 대조적으로 교실앞에서 까다로운 표정으로 서 있는 선생님의 얼굴이 화면에 잡힌다. 뮤직비디오 말미에는 체육관에서 단체로 춤추는 학생들을 제지하러 들어온 선생님이 결국 음악에 맞춰 흔들거리는 장면까지 나오는데, 다시 보아도 꽤나 인상적인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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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내 마음 속에는 두 명의 요정이 있다. 한국에는 S.E.S의 유진이 있고, 미국에는 브리트니 스피어스가 있다. S.E.S 유진은 초등학교 5학년때 괌으로 이민을 갔으니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했던 언니 2명은 모두 미국 출신이었다. 이들이 영어를 잘하니 나도 영어를 잘 해야한다는 건설적인 결론을 내렸다.


(*4)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보컬은 숨을 많이 섞은 얇고 부드러운 음색(breathy baby voice)에 비음(nasal placement) 기반의 앞쪽에 몰린 얇은 발성이 특징이다. 특히 낮은 음역에서는 브리트니 특유의 ‘끈적하게 눌러 부르는’ 발음이 두드러진다. <Oops! I Did It Again> 뮤직비디오에서 2분 57초에서 3분 7초 사이, 화성에 파견된 우주인과 대화를 나누는 내레이션 장면이 등장한다. 그 구간에서 부드러운 그녀의 발성이 두드러진다.


(*5) "Baby, I'm so into you You got that something What can I do? Baby, you spin me around

The earth is moving, but I can't feel the ground" 라는 가사가 감정을 그대로 보여준다.


(*6) 사우디 현장에서 유독 힘들었던 하루에는 퇴근 후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뮤직비디오를 시청하는게 큰 위안이었다. 특히 파란 캘리포니아 말리부 해변(Paradise cove)를 배경으로 촬영된 “Sometimes” 사막 한 가운데 위치한 컨테이너 숙소에서 만끽하는 치유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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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트랙 제목만 훑어보아도 앨범의 정서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Baby One More Time, You Drive Me Crazy, Sometimes, Soda Pop, Born to Make You Happy, From the Bottom of My Broken Heart, I Will Be There, I Will Still Love You, Thinking About You, E‑Mail My Heart, The Beat Goes On. 혼란과 설렘에서 시작해 달달함과 과몰입을 거쳐, 이별과 회복, 그리고 잔향으로 이어지는 서사 구조다.


(*8) 관제탑 직원이 샌드위치를 양 쪽 볼 가득 채운 채 멜로디에 맞춰 고개를 좌우로 흔드는 장면이 있는데, 1초도 안되는 찰나의 순간이라 캡쳐도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 표정만은 세상에서 제일 맛있게 샌드위치를 먹고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 (화성에 파견된 우주인과 통신하느라 야근 중에 먹던 야식이었을거다. 뮤직비디오 2분 27초 쯤에 등장한다.)

image.png <소스를 뜯으며 샌드위치(혹은 스낵랩)를 먹을 준비를 한다>

(*9) 브리트니 스피어스가 먹고 입는 것까지 궁금해하던 나는 그녀가 모델로 활동하던 스케쳐스(Skechers) 운동화를 대학교에 가면 꼭 신어보겠다고 다짐했고, 실제로 그 운동화를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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