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충돌과 이해 사이

전(轉) – 정지된 세상 속에 스며든 균열

by 게으른 개미

처음엔 그저 낯설고 아름답기만 했던 새벽의 사막 하늘이 어느 순간, 그저 일상이 되어 있었다.
낯섦은 점차 익숙함으로 바뀌었고, 적막과 불편함조차 이 땅의 공기처럼 몸에 스며들었다.
‘나도 이제 이곳의 일부가 되었나 보다’고 생각하던 그때 - 갈등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한국에 있을 때도 현지 업체들과의 이메일 교신은 늘 인내심의 끝자락을 시험하는 일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속에서는 화산이 터졌다. 하지만 그것은 예고편에 불과했다. 직접 얼굴을

마주한 이후에야 알게 됐다.

진짜 폭발은 이제부터라는 걸.


사우디 현지 업체들과의 미팅은 늘 같은 흐름이었다.
반복은 사람을 무디게 만들고, 무딤은 결국 사람을 지치게 한다. 못하면 못한다고 말하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언제나 “된다”라고 했다. 그리고는 지키지 않았다. ‘약속’은

있었지만, ‘기약’은 없었다. 세상이 나를 빼고 모두 몰래카메라를 찍고 있는 것 같은 기분

—그게 바로 여기의 일상이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오늘’은 좀처럼 실체를 갖지 못했다.
대신, ‘내일’ بكرة • (bukra) tomorrow이라는 단어가 모든 것을 덮고 지나갔다.
“내일 드릴게요.”
“내일 확인하겠습니다.”
그 ‘내일’은 실존하는 시간이 아니라, 지연과 미루기를 정당화하는 마법의 언어였다.
나는 그 흐름에 저항하려 애썼지만, 그들에게 끌려가고 있었다. 그들의 시간 개념은

나의 언어로는 설명되지 않았다.


대화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중동식 화법은 매번 내게 퀴즈를 내는 듯했다.
직설이 필요한 순간에도, 그들은 끝없이 빙 돌아 말을 던졌다. 내 안에는 늘 물음표가

가득했다. '이 사람이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은 뭘까?'


어느 날, 나는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네가 우리 덕분에 자재를 샀잖아. 그러니까 우리가 자재를 납품할 수 있도록, 네가 우리

요구를 들어주고 협조해야지.”


그 말은 나에게 논리의 붕괴, 상식의 해체처럼 다가왔다.

자재를 확보하기 위해 돈을 지불하고 계약을 체결한 쪽은 우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약을 성실히 이행하지 않는 쪽이 오히려 우리에게 일방적인 협조를 요구하다니. 정작 본인은

최소한의 계약 의무조차 지키지 않으면서, 우리에게는 ‘지원’, 더 정확히 말해 굽실거림을 요구

하는 그 태도는 오만의 극치였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 여기는 내가 알던 세계와는 다른 좌표 위에 서 있는 것 같았다.


메일, 회의, 외근, 보고, 야근—시간은 초단위로 나를 짓눌렀다.
긴장과 피로는 틈조차 주지 않고 내 일상 전체를 잠식했다.


그 와중에 느릿느릿 걷는 아람코 직원들의 모습은, 그들만의 여유와 나의 초조가 얼마나 동떨어진

세계에 있는지를 새삼 실감케 했다. 그들의 발걸음은 마치 슬로 모션(Slow Motion)처럼 느껴졌다.

나는 문득, 멈춰 선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지금 여긴, 무한의 여유와 무한의 스트레스가 동시에 존재하는 세계구나.


같은 장소, 같은 시간 속에서도
누군가에겐 평화이고, 누군가에겐 전쟁이었다.


왼쪽부터

[사진 1] 사우디의 던킨 도넛. 괜히 한국보다 더 달고 빵도 기름진 느낌이다. (저 초코를 보라!)

[사진 2] 미니 모닝빵 사이에 양고기가 꽂혀있다. 제법 맛있고 배도 안 불러서 계속 먹게 된다.


[사진 3] 사우디 H 모 회사의 구내식당 점심 메뉴. 첫 방문 환영의 의미로 내게 제공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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