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엔딩이 아닐지라도 - 시험관 고차수 난임에세이
시간이 멈추어준다거나 그게 어렵다면 조금 느리게 가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언젠가부터 내 시간만 되게 멈춰있는 느낌이었다. 주변의 많은 것이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변하는데, 나만 늘 제자리인 것 같았다.
일찌감치 결혼한 친구들의 아이들은 대부분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다. 옛날 어른들이 아이 크는 모습을 보고 시간이 간 걸 알겠다 했는데 정말, 그랬다. 기어 다니던 아이들이 기저귀를 떼고 걸음마를 하더니 어느 순간 못하는 말이 없었다. 아기 때는 무조건 예쁜 이모라며 폭 안겨주던 아이들이, 이제는 컸다고 낯을 가리며 인사만 겨우 꾸벅하고 돌아서는 사춘기에 가까운 행동까지 하기도 했다. 이 아이들이 이렇게 크는 동안, 내 친구들이 이 아이들을 이렇게 키워내는 동안 난 뭘 한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혼으로, 골드미스의 삶을 살아가는 친구들은 점점 사회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들이 되고 있었다. 그들이 하는 일들이 화제가 되어 유명한 자리에서 이야깃거리로 오른다던지, 미디어에 등장하는 일들도 종종 있었다. 차곡차곡 쌓아온 레퍼런스가 있었고, 한 분야의 리더로, 전문가로 인정을 받고 있었다.
퇴사를 한 건 내 선택이긴 했다. 퇴사를 하더라도 종종 프리랜서 신분으로 프로젝트들을 이어받아하기로 되어있었기 때문에 당장의 일거리 문제로 큰 걱정을 하지는 않았다. 결혼을 했고, 남들처럼 그냥 아이도 낳아야 할 거라고 생각했다. 아이를 낳게 되면 이 일을 더 이상 하기 힘들 거라고 생각했다. 몸 담고 있던 조직은 여성이 육아를 하면서 병행하기 힘든 업무 환경이었기 때문이다. 일과 육아를 동시에 다 멋지게 해내는 슈퍼우먼 뭐 그런 것이 꿈은 아니었다. 육아를 하는 동안에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 정도를 하고 싶었다. 그전에 미리 프리랜서로 일할 수 있는 경험과 환경을 다져 놓는 것은 좋은 선택이라 여겨졌다.
계획한 대로 금방 될 거라는 생각은 안 했지만, 그래도 노력을 하면 머지않아 아기가 생길 줄 알았다. 어느 날 생생한 코끼리 꿈을 꿨다. 핑크색 코끼리가 강아지마냥 내 눈앞에서 놀고 있었다. 이게 말로만 듣던 태몽이구나 했다. 남편에게 꿈 이야기를 했더니 남편도 태몽인 줄 알고 좋아하며 신기해했다. 하지만 그건 그냥 개꿈이었다. 개가 나온 것도 아닌데 코끼리가 나왔는데, 코끼리 꿈이 아니고 그저 개꿈이 되어버렸다.
남편의 이직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서울에서 꽤나 멀리 떨어진 곳이었고,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동네였다. 신도시이긴 했지만 아직 인프라 조성이 잘 되어있지 않아 많은 것이 불편했다.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있는 것은 작은 구멍가게 하나뿐이었다.
남편이 출근을 하고 나면 아주 오랜 시간 혼자였다. 남편의 직무는 많은 계열사를 둔 지주회사의 인사직이라 업무가 매우 많았다. 이른 퇴근이 저녁 8-9시 정도였고 대부분 자정이 다 되어 들어왔다. 남편이 출근할 때 잘 다녀오라는 인사를 하고 나면 그 이후엔 입을 열어 말을 할 기회가 한 번도 없을 때도 있었다. 일감이 있을 때에도 첫 미팅 한 번 다녀오면 그 이후에는 거의 페이퍼 작업이기 때문에 하루 종일 입 한 번 열지 않고 혼자서 일을 했다. 그러다 혼자 밥 먹고, 혼자 쉬다가 또 혼자서 일을 했다. 내가 살고 있던 아파트 말고 주변은 온통 공사장이었다. 잠시 바깥공기가 쐬고 싶어 나갔다가도, 먼지 풀풀 날리며 달리는 덤프트럭을 피해 곧 다시 집으로 들어오곤 했다. 달갑지 않은 전화를 받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다지 긴밀히 소통하고 싶지 않은 지인이거나, 부동산 광고 같은 전화였다. 예전 같으면 바쁘다고 하고 끊어버릴 그런 전화들을 생각보다 오래 붙잡고 있는 경우들도 생겼다. 그나마 그런 전화가 아니면 정말 말할 상대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새로 몸담을 조직을 찾을 생각은 없었는데, 이런 생활을 몇 달 지속하다 보니 생각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사람과 부대낄 수 있는 환경이 너무나 필요했다. 이 동네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싶었는데, 찾아보니 근처에 작은 공공기관들이 몇 개 있었다. 연구계약직 등으로 2, 3년 단위마다 내가 일했던 분야의 포지션을 지속적으로 채용하고 있었다. 짧게는 6개월~1년 근무자를 뽑는 계약직도 있었다. 이번 채용이 끝나도 조만간 또 후임자를 뽑을 것이었다. 일단 임신을 준비하고 육아를 계획하는 나에게 부담스럽지 않고 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석사 이상의 학위를 요구하는 곳이 많았다. 오래전 수료해놓고 마무리하지 못한 석사과정을 서둘러 마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논문을 쓰는 것보다 더 부담스러운 것은 지도교수님을 찾아가야 하는 문제였다. 마침 박사과정 시작을 고민하던 친구가 있어 겸사겸사 같이 가 줄 것을 부탁했더니 흔쾌히 동행을 해 주었다. 오랜만에 다시 책을 보려니 머리가 터질 것 같았지만, 지도교수라는 큰 산을 넘었는데 고작 이것 하나 못할까 싶어 내 안의 온갖 깡을 다 끌어모았다. 어찌어찌 논문 한 편이 완성되었고, 간신히 졸업을 했다.
논문을 쓰는 중에 산부인과 검진을 한 번 갔었다. 이게 방광염 증세인가 싶었기 때문이다. 논문 때문에 스트레스가 쌓여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약이라도 처방받아오자 싶어 갔는데, 다행히 방광이나 소변검사에서는 큰 이상이 없었다. 그런데 선생님이 혹시 임신 계획이 있는지를 물었다. 계획 중이고 계속 시도를 했는데 잘 안되었다고 했다. 초음파에서 뭔가 의심이 될 만한 걸 보았던 건지, 언제 시간이 되면 다시 나와서 피검사와 나팔관 조영술 등의 정밀검사를 한 번 해보라고 했다. 그 병원은 산과, 부인과, 내과, 소아과, 난임센터가 함께 있는 종합 여성병원으로 난임센터를 꽤 크게 운영하고 있었다.
논문 작업의 막바지였고 마무리가 급하긴 했지만 2세 계획도 더 이상 여유롭진 않았다. 이미 시도한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 이렇다 할 소식이 없어 사실 마음이 불안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예약을 잡고 이런저런 검사를 진행했는데 결과가 별로 좋지 않았다. 남편 검사까지 받아보아야 최종 진단을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해서 주말을 이용해 남편도 검사를 마쳤다. 남편의 검사 결과도 좋지 않았다.
자연적으로는 임신이 매우 힘든 상황이었다. 병원에서는 인공수정도 건너뛰고 바로 시험관을 하기를 권했다. 내 나팔관의 한쪽이 막혀있었기 때문이다. 자연임신이나 인공수정으로의 임신 시도는 격월로 진행해야 하는 상황이었고, 진행한다고 하더라도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고 했다.
다른 난임 환자들은 처음에 어땠나 모르겠다. 나에게는 약간 시한부 선고를 받는 듯한 느낌의 충격이었다. 상황을 인정하고 본격적인 난임 치료를 받자고 결정하기까지도 석 달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계획했던 학위를 받긴 했지만 공공기관의 취업 도전은 흐지부지 되었다. 입사하자마자 고작 계약기간 2년 안팎의 계약직이 난임 진료받겠다고 툭하면 휴가 쓰고 다닐 순 없었기 때문이다.
변화를 주고 싶었던 일상에 난임이라는 것이 찾아왔다. 하지만 새로 더해진 것은 삶의 질 개선에 도움이 될 만한 터닝 포인트가 되어줄 만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전보다 더 쉽지 않은 날들을 만들어 주었다. 난임 치료로 인한 몸과 마음의 변화, 이런 경험이 처음이라 이런 컨디션을 어떻게 다루며 살아야 할지 잘 몰랐다. 끝이 보이지 않는 여정에 나의 내년, 내후년의 모습이 전혀 예상되지 않아 마음이 불안했다. 그러다가, 코로나가 터졌다.
전염병이 창궐하니, 온 세상이 그야말로 멈춰버렸다. 시간을 멈춘다는 게 가능한 일일지 몰랐다. 나의 시간만 빼고 세상의 모든 시간이 정신없이 흘러가는 것을 보면서 숨이 찬 느낌이었는데, 멈춰 버린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나의 호흡이 언젠가부터 조금 편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나자는 약속이 생기지 않는 것도 나에게 편안함을 주었다. 사람들을 만나 전할 수 있는 나의 근황이 딱히 없었었다. 예전처럼 뒷담화 하고 싶은 직장 상사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내 안에 있는 스트레스는 수다로 풀만한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현재 내 삶의 큰 이벤트라고 해봐야 난임 치료 밖에 없는데, 오히려 이 이슈를 밖으로 꺼냈을 때 사람들의 대화거리가 되는 것이 더 스트레스였다. 진심 어린 걱정이든, 오지랖 섞인 간섭이든 어떤 것도 나에게 필요하지 않았다. 좋은 정보라고 알려주는 것들 중에 내가 미처 몰라서 이건 너무 요긴하다 싶은 것들은 하나도 없었다.
교회 분들의 기도조차도 부담스러웠었다. 빨리 그분들의 기도에 내가 부응해드려야 할 것만 같고 그랬다. 내게 요즘 몸은 어떠냐며 안부를 묻는데, 나를 걱정하는 진심보다는 그간의 상황에 대해서 업데이트받고 싶은, 자신의 궁금증을 채우고 싶은 마음이 더 느껴졌다. 정말 진심으로 기도해주신 분도 있겠지만, 내 마음이 워낙 좁아져있어서였는지 어떤 사람에게선 그 진심이 다 헤아려지지 않았다.
어느 날부터는 모든 종교모임들도 다 셧다운을 시켰다. 온라인 중계로 드려지는 예배에서 텅 빈 예배당을 바라보는 것은 마음이 좋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관심과 소리가 사라지니 내 내면이 고요해짐을 느끼며 예배에 더 집중이 되었다. 독대하는 예배의 자리가 사실 더 필요했던 시간이었다. 그 자리가 코로나와 함께 선물처럼 나에게 찾아와 주었다.
남편은 일주일에 절반 정도 재택근무를 했다. 외식도 불가능한 상황에서 하루 세 끼를 집에서 온전히 해결해야만 했다. 식사 준비가 버거워 처음에는 배달을 많이 시켰다. 하지만 배달 음식으로 언제 끝날지 모를 이 시간을 버티기에는 비용도 무시하지 못했고, 건강적으로도 좋지 못했다.
요리하는 것을 좋아했고, 음식을 곧잘 하던 편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음식을 해도 먹을 사람이 없다 보니 식재료들이 늘 남고 버려졌다. 남편과 마주 앉아 식사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잘해야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였다. 해 먹기보다는 사 먹는 편이 낫다고 여겨졌었다. 그리고 그 생활이 오래 지속되다 보니 음식을 해 먹는 행위가 무척 어색하게 느껴지고, 해 먹을 수 있는 날에도 사 먹는 쪽을 택하는 날들이 더 많아졌었다.
다시 음식을 해야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에 음식을 하려니 처음에는 쉽지 않았다. 음식을 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별미로 한 끼 먹고 끝낼 음식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다음 끼니, 그 다음 끼니를 계속 이어 먹을 수 있는 집밥을 해야 했다. 집밥을 한다는 것의 기본은 남은 식재료로 다음 음식을 어떻게 이어나가야 할지 식단을 생각해야 하는 것이었다. 하루 세 끼 일주일의 흐름을 꼬박 만들어 가야 하는 과정에는 생각보다 섬세한 계획이 필요했다.
타고난 J 성향에다가 양가 할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미각과 손맛이 합쳐져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 나는 집밥을 차려내는데 도사가 되었다. 식재료들이 마지막까지 버려지지 않고 한 끼, 한 줌 반찬으로 마무리되는 것을 보면 마음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하루 종일 붙어있으며 삼시 세 끼를 챙겨 먹는 남편을 삼식이라 부르며 구박했지만, 마음 한 켠에선 삼식이가 되어 나타난 남편의 존재가 참 풍성하게도 느껴졌었다.
사람 하나 든 자리가 이렇게 든든할 줄 몰랐다. 나는 내 책상에, 남편은 남편 책상에 앉아 각자의 일을 할 때면 예전 직장 생활이 생각이 나기도 했다 (남편과 나는 사내커플로 만났다). 끼니 때가 되어 밥상을 차려 마주 앉으면 이게 바로 식구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밥상을 차리는 수고가 힘든 날도 있었지만, 즐거운 날이 사실 더 많았다. 남편 하나 집에 있는 것이 뭔가 사람과 부대끼며 사는 느낌이 들었고, 어떤 일 하나를 더 하더라도 사람의 존재는 동기부여가 되었다. 너무 오랜 시간 혼자였던 나에게 진정한 식구가, 가족이, 그리고 동료가 생긴 느낌이었다.
외출이나 여행에 제한이 생기다 보니 일상의 사진을 찍는 것을 좋아했던 나는 음식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매일매일 차려먹는 밥상을 찍고, 밥상을 차리면서 들었던 생각들을 짧게 글로 적어 SNS에 올렸다. 어느 순간 돌아보니 우리 집만의 집밥 포트폴리오가 만들어져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나의 집밥 사진과 글을 좋아해주었다. 유투브를 해보라고 권유해 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영상은 내가 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닌 것 같아 고사했지만, 생각지 못한 방법으로 내 일상의 작은 열심을 인정받는 것 같아 그런 코멘트만으로도 기분이 참 좋았다.
불편했던 것들로부터의 자유, 함께 있어주는 동료이자 가족의 존재, 밥상을 차리고 글을 쓰는 일련의 이런 에피소드들은 오랜 시간 난임으로 위축되어 있던 나의 마음을 꽤 많이 회복시켜주었다.
코로나의 시간은 모두에게 참 어려운 시간이었지만, 죄송하게도 나에게는 많은 것들이 회복되는 감사한 시간이기도 했다. 코로나와 상관없이 나의 시간은 전에도 느렸고 지금도 느리지만, 거북이 같이 어딘가로 계속 흘러가긴 했다. 그 시간들을 늘 착한 마음으로 거쳐갔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세상에 대한 질투와 상처가 있었던 터라, 자고 있는 토끼를 굳이 깨우고 싶지 않았다. 토끼가 조금 더 오래오래 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실 코로나가 아주 조금만 더 오래갔으면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이제는 아픈 사람이 더는 없어야 하고, 세상도 원래대로 돌아가야 하니까 코시국은 이쯤에서 마무리되어야 하는 것은 맞다. 멈춰진 시간 덕분에 잠시 온전히 거북이로 살 수 있어서 감사했다. 결승 지점에 뭐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는 몸도 마음도 많이 회복이 되어서, 전보다 조금 속도를 내서 걸어갈 수 있을 것 같다. 이제는 토끼가 일어나 좀 빠르게 쫓아와도 크게 상관없을 것 같다. 이제는 토끼를 재워놓고 무작정 서둘러 가고 싶은 것이 나의 소망이 아니다.
시험관 고차수이고, 난임을 겪고 있습니다. 요즘, 우리 가정의 오랜 노력과 소망이 어쩌면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아도 좋겠다는 위험한 생각을 합니다. 말이 씨가 된다고 하는데 진짜 그러면 어쩌려고 이제 글까지 써서 남기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지난 수년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마음들을 정리해봅니다. 누구나 바라는 것이 있겠습니다. 그 모든 바람이 해피엔딩이 아닐진대, 인생의 섭리를 인정하며 나에게 이 경험이 왜 찾아왔을지 사유해봅니다. 비슷한 상황에 있는 누군가에겐 부디 공감과 위로를 드릴 수 있길 바랍니다. 연재를 하지만, 의식의 흐름대로 글을 적다 보니 글의 시점이 과거와 현재를 넘나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