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가을 May 23. 2022

08_코로나 시대에 난임을 겪는다는 것

해피엔딩이 아닐지라도 - 시험관 고차수 난임에세이


오랫동안 치료를 받던 병원에서 나와 다른 병원으로 옮겼을 때쯤 코로나가 발생했다. 사실 난임을 겪은 이후로 세상의 다른 일들에 큰 관심이 없었다.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든, 정치판에 무슨 일이 있든 상관이 없었다. 내 몸 하나 돌보기도 벅찬 하루하루였다. 세상이 아무리 크더라도 내 안의 우주가 더 크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더 복잡하게 느껴졌었다. 그런 나에게도 우한이 어쩌고, 박쥐가 어쩌고, 폐렴이 어쩌고 하는 큼직큼직한 키워드가 들릴 정도였으면 뭔가 큰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긴 했다.


언젠가부터 미세먼지가 봄의 불청객이 되면서 우리 집에도 마스크가 조금 상비되어 있긴 했다. 어떤 사람은 메르스 이후 사둔 마스크가 있다고도 했다. 그런데 사실 나는 메르스 때에도 그렇게 심각성을 잘 느끼지 못하고 살았다. 당장 마감해야 하는 프로젝트들이 눈앞에 줄줄이었는데 큰 사고 없이 프로젝트의 종료를 성공적으로 잘 해내는 것이 오로지 목표였을 뿐, 뉴스에 나오는 전염병 따위 조심하며 살 틈이 없었다. 그러던 중 메르스가 첫 발병했다는 그 병원에서 지인 분 어머님의 장례식이 치러졌었다. 그제야 조금 걱정이 되긴 했지만 그때만 해도 전염병 하나 때문에 경조사에 참석을 안 한다는 것은 좀 유난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병원이 위치한 동네에 도착하니 온 동네에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는 것이 유령도시 같기도 하고 무슨 영화 세트장에 온 것은 아닐까 싶었다. 서둘러 조문을 마치고 돌아왔다. 그런데 해당 병원에 다녀왔다고 하는데도 주변에서는 나를 크게 피한다거나 걱정하는 사람이 생각보다 별로 없었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메르스는 그저 뉴스에나 나오는, 나와 크게 상관없는 어떤 사건처럼 여겼다. 대학교 때는 사스라는 전염병이 돌았고, 그 사스 때문에 졸업여행이 취소가 되었다. 사스의 심각성이 어떤 건지는 잘 몰랐었지만, 친구들과 나는 그저 오래 준비해오고 기다려왔던 해외로의 졸업여행이 무산되었다는 것이 너무 속상하기만 했다. 그 다음 해에는 예전처럼 졸업여행을 다 떠났다. 사스는 그저 나의 한 번뿐인 졸업여행을 못 가게 만든 얄미운 존재 정도로 기억되는 전염병이었다.   


뭔가 심각한 전염병이 또 시작이 되었구나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사실 이번에도 크게 와닿지 않는 것이었다. 위험지역(위험지역이라는 것이 그 당시에는 해외 입국자들이 있는 공항 정도라고 생각했었다)에만 가지 않고 몇 달만 조심하면 이전의 다른 전염병들처럼 조금씩 잠잠해질 거라고 생각했다.


집에 있던 마스크 하나를 꺼내 쓰고 새로운 병원으로 향했다. 처음 전원을 하면 주치의를 만나기 전에 상담실에 먼저 들러 가져온 서류들을 제출하고 간단한 면담을 한다. 상담실에 들어갈 때는 마스크를 벗었다. 처음 사람을 대면해서 만나는 자리인데 마스크를 쓴 채 이야기를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만 해도 코로나 발생의 초창기였고 아직 마스크를 쓰지 않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마스크를 쓰다가도 누군가를 대면해야 할 일이 있거나 말을 해야 할 때는 서로 마스크를 살짝 내렸다. 마스크 때문에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을 것을 배려하는 행동이었다.

그동안 다녔던 병원에서 전원 서류를 떼었는데 진료기록이 거의 책 한 권 수준이었다. 어차피 그 기록을 일일이 다 볼 수도 없을 것 같아, 찻수별로 처방과 경과, 최종 결과 등을 내가 다시 엑셀로 정리해서 가져갔다. 새로 만나게 된 주치의 선생님이 내 진료 기록을 보더니 그동안 고생을 많이 했다며 초음파상으로도 지금 난소가 많이 지쳐 보이니 한두 달은 피임약을 먹고 좀 쉬었다가 시작해보자고 했다. 혹시 코로나 때문에 조금 찜찜하면 아예 한 세 달 정도 푹 쉬었다가 시작하는 것은 어떻겠느냐고도 했다. 괜찮은 제안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때는 선생님이나 나나 세 달 정도면 이 전염병의 심각성이 좀 나아질 줄로만 알았다.  




그랬던 코로나가 2년을 꽉 채우고 3년째에 접어들었다. 코로나 시대에 난임을 겪는다는 것, 참 쉽지 않은 일이었다.


코로나에 걸려도 괜찮은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 나는 정말 코로나에 걸리면 안 되었고 코로나에 걸리지 않게 유난스럽게 조심을 했다. 코로나 이전 과배란을 시작할 때마다 붙들었던 걱정은 나의 난포들이 건강하게 잘 커줄까, 호르몬제에 대한 반응을 잘해줄까 하는 것들이었다. 그런데 코로나 이후에는 난포가 몇 개나 얼마나 건강하게 잘 커 줄지 하는 걱정은 두 번째 문제였다. 채취 날까지 코로나에 걸리지 않고 무사히 수술대에 누울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바람이었다. 

과배란 중에 코로나 확진이 되면 그 주기는 그냥 취소가 된다. 격리에 들어가야 하니 병원에 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난임 환자들은 매달의 난포 하나하나가 참 소중하다. 특히 고차수일 경우는 더 그렇다. 다음 달에 상황이 또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인데, 코로나 때문에 기껏 키워온 난포를 뽑아내지도 못하고 그냥 지나가야 하는 것은 너무 마음이 힘든 일인 것이다.


한 번은 난임 환자들이 모인 인터넷 카페에 고민 글이 하나 올라왔다. 가족 중에 확진자가 생겼는데 본인이 채취를 앞두고 있다는 것이었다. 가족이 확진이 되면 모든 동거 가족이 무조건 격리에 들어가야 했던 때였다. 이 사실을 숨기고 채취를 꼭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겠냐는 내용이었다. 그 글에 순식간에 그 사람을 비난하는 댓글들이 우수수 달렸다. 다른 곳도 아니고 난임병원이다, 어떻게 본인 생각만 하냐, 너 하나 때문에 의료진들 다른 환자들 다 감염되면 책임질 거냐, 이기적이다 등등의 내용들이었다.

상상으로도 생각으로도 절대 해서는 안 될 행동이었다. 어느 병원에서 확진자가 나왔다고 하면 병원 홈페이지나 상담실에 글과 전화가 끊이지 않았고, 실제로 난임병원마다 확진자가 한 둘씩 나와서 하루 이상 셧다운을 하던 때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사람의 마음이 너무나 이해가 되기도 했다. 기껏 키워온 난포를 뽑지도 못하고 버리는 것이 가장 속상하긴 하겠지만, 사실 지금껏 들어간 돈도 무시를 못할 것이다. 보험이 끝나버린 시험관 고차수 환자들은 과배란 단계에서만도 매 진료 때마다 수십만 원의 비용을 지불하는데, 확진이 되어 채취가 취소되면 그 돈이 그냥 버려지는 것이다.


그러다 나라에서 백신을 맞으라고 했다. 내 차례가 되어 일단 예약은 해두었었지만, 고민 끝에 결국 백신을 맞지 않았다. 먼저 접종을 한 사람들로부터 백신으로 인한 생식 장애, 배란 장애들의 부작용들이 여럿 나타난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난임 카페에도 백신 접종 후 틀어진 생리주기, 부정출혈, 배란장애 등의 문제들을 호소하는 글들이 계속 올라왔다. 단톡방에 있는 친구들 중에서는 예전에 없던 미성숙 또는 공난포로 인해 걱정을 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병원 선생님은 백신을 맞아도 된다고 했다고 하는 반면에, 어느 병원에서는 시험관을 하는 동안에는 백신을 맞지 않는 것이 좋다고 했다고 한다. 결정은 나의 몫이었다. 내가 미혼이고 당장 임신 계획이 없었다면 잠시의 생식장애쯤은 여느 다른 백신 접종에서도 몸살처럼 겪고 지나가는 흔한 부작용처럼 여기고 접종을 했겠지만, 당장 임신을 계획해야 하는 입장에서 안 그래도 여러 위험 요소들이 있는 상황에서 그런 부작용은 최대한 피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질본에서는 임신을 앞두고 있다면 더더욱 접종을 해야 한다고 했지만, 나는 언제 될 지 모를 임신과 그 후의 상황보다 우선 정상적으로 건강하게 임신이 되는 것이 더 중요하고 급했다. 그래서 접종을 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다니는 병원에 소위 '삼신할머니'로 불리는 용한 선생님이 계셨다. 아무리 어려운 케이스도 그 분 손이 닿으면 척척 임신이 되었다. 사실 그분께 진료를 받고 싶었는데 초진 대기가 너무 길어서 기다리다 못해 다른 선생님께 진료를 받게 되었다. 그 삼신 선생님의 처방 중 독특한 것이 있었는데, 개발된 지 10년이 되지 않은 약은 절대 쓰지 않으신다는 거였다. 아무리 임상을 거쳤더라도 어떤 부작용이 있을지 모르는데 난임과 같이 경우의 변수가 많은 환자들에게는 그런 약을 처방하지 않는다 했다.


그래서 그 선생님께 진료를 받는 친구들은 배에 자가주사를 할 수 있는, 기존 약보다 다소 편한 방법의 호르몬제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엉덩이를 돌로 만드는 주사를 맞거나 아니면 질정을 썼다. 근육주사는 비전문가가 자가주사를 할 수가 없는 부분이라 주사 의뢰서를 들고 매일 동네 병원에 가서 부탁을 하고 맞아야했다. 물론 매번 주사 행위비를 지불해야 하기도 했다. 환자들이 많은 불편을 겪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 처방을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코로나 백신을 보면서 신약 처방을 조심스러워하시던 그 선생님이 생각나기도 했다. 난임환자는 코로나 백신에 좀 더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는 게 맞지 않을까 싶었다.


나의 난임 원인으로는 높은 자가면역 수치도 한몫을 했다. 자가면역세포 수치가 높은 것은 배아가 자궁에 착상을 하지 못하도록 막거나, 아니면 착상된 아기를 안전하지 못한 외부 공격으로 여겨 밀어내어 유산을 일으킬 수 있는 가능성을 잠재한다고 했다. 내 자가면역 수치는 이미 한 차례 갑상선 수치를 흔들어 놓기도 했고, 오랜 반복 착상실패와 예상치 못한 유산 경력까지 있었기 때문에 병원에서는 나에게 매번 면역 글로불린을 처방했다.


이식 때마다 면역 글로불린 주사를 통해 일시적으로 면역을 조금 낮춰주었다. 떨어진 면역 때문인지 링거를 맞고 며칠은 열과 몸살에 시달리고, 체력이 다시 온전히 돌아오기까지는 대략 한 달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면역 글로불린을 맞는 중에는 일반적으로 모든 백신 류의 접종을 최소 3개월 정도 미루라고 한다. 다른 부작용이 있거나, 백신의 효과가 충분히 나타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면역 글로불린 때문에라도 당장 접종을 하기도 힘들었었다. 그러다 백신 패스가 도입되고 미접종자에 대한 제한이 시작되면서 일상에서의 불편함이 점점 많아지기 시작했다. 마트까지 제한을 하니 앞으로 이 제한 반경이 얼마나 더 커질지 좀 무섭기도 했다. 미접종자에 대한 낙인을 감출 수가 없다 보니 이젠 물러설 곳이 없이 접종을 하긴 해야 하는 건가 싶었다. 코로나 기간 동안 총 네 차례 면역 글로불린을 맞았다. 막상 접종을 해볼까 해도 면역 글로불린과 기간을 두고 해야 하는데 그럴만한 틈이 없기도 했다. 좀 불편해도 접종은 가능한 최대한 미뤄보기로 했다.

 



남편도 나와 함께 똑같이 유난을 떨었다. 오미크론이 등장하면서부터는 접종자든 미접종자든 상관없이 확진자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남편은 접종 완료자이긴 했지만, 그런 상황에서는 언제 어떻게 걸릴지 모를 일이었다. 일을 해도 대부분 재택근무를 하고 외부 활동이라곤 병원 말고는 거의 다니지 않는 내가 혹시라도 확진이 된다면 남편에 의해서 말고는 찾을 원인이 없었다. 남편도 일주일에 절반은 재택근무를 했지만, 출근을 하는 날에도 점심은 꼭 집에 와서 먹었다. 집에서 회사가 가까운 것이 다행이었다. 양치도 집에서만 했다. 회사에서는 마스크를 벗을 일을 절대 만들지 않았다.


매번 집에 가서 점심을 먹고 온다는 남편을 회사 동료들은 유난스럽게 보기도 한 것 같다. 이젠 걸려도 심해봤자 독감처럼 앓고 지나간다는데 뭘 저렇게까지 하나 생각하기도 했을 것이다. 사람들의 시선이 뭐가 되었든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우리 몸을 지키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우리를 유난스럽게 본 것은 남들 뿐만 아니라 가족들의 시선도 그랬다. 언젠가부터 외식이라곤 일절 하지 않는 우리였는데, 가족들이 모이면 어떻게든 외식을 하고 싶어 했다. 우리 말고 다른 가족들은 대부분 자유롭게 바깥 활동을 하는데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고 왔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집에서 모이는 모임일지라도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는데, 외식을 하자고 하면 마음이 너무 불편했다. 결국 외식을 해야 하는 자리의 가족모임은 참석을 하지 않았다. 내가 접종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가족들은 온전히 이해를 하지 못했다. 긴 시간을 들여 자세히 설명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난임 자체도 그저 표면적으로만 이해할 뿐인 사람들에게 설명을 한다고 해도 어디까지 이해를 시킬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코로나 시대에 난임을 겪는다는 것이 어떤 상황이고 어떤 의미인지는 결국 난임 부부 당사자 외에는 아무도 몰랐다.


 유난을  덕분인지 남편과 나는 아직까지 확진자 반열에 들지 않았다. 감사한 일이다. 많은 제한들이 풀리긴 했지만 아직 우리는 여러 부분에서 조심하며 사는 중이다. 영원할 것만 같던  역병에 끝이 보이고 있어 정말 다행이다. 난임 치료 기간의 절반을 코로나와 함께 보냈기 때문에, 난임의 경험을 생각하면 코로나를 함께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한편, 코로나 시대에 난임을 겪는다는 것이  마냥 답답하고 걱정되고 힘들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생각지 못한 회복과 감사의 제목들이 주어진 시간이기도 했다.   



시험관 고차수이고, 난임을 겪고 있습니다. 요즘, 우리 가정의 오랜 노력과 소망이 어쩌면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아도 좋겠다는 위험한 생각을 합니다. 말이 씨가 된다고 하는데 진짜 그러면 어쩌려고 이제 글까지 써서 남기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지난 수년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마음들을 정리해봅니다. 누구나 바라는 것이 있겠습니다. 그 모든 바람이 해피엔딩이 아닐진대, 인생의 섭리를 인정하며 나에게 이 경험이 왜 찾아왔을지 사유해봅니다. 비슷한 상황에 있는 누군가에겐 부디 공감과 위로를 드릴 수 있길 바랍니다. 연재를 하지만, 의식의 흐름대로 글을 적다 보니 글의 시점이 과거와 현재를 넘나 듭니다.
이전 08화 07_뭐 다 안 된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