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8시 반쯤 옆 동 16층에 불이 났으니
대피하라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아파트 화재는
TV에서만 보던 일이었기에,
실제로 내가 사는 곳에서
불이 난 모습을 보자 공포가 밀려왔다.
서둘러 밖으로 나가기 위해
옷을 입었다.
평소엔 소중히 여기던 물건이 많았지만,
불 때문에 누군가 죽을 수도 있는
긴급 상황 앞에서 그 물건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핸드폰만 챙겨서 급히 뛰쳐나왔다.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평범한 하루를 쭉 보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이 눈앞에 찾아온다면?’
‘내가 26살에 죽을 수도 있겠구나!’
9년 전 중환자실 침대 위에서 했던 생각이다.
뼈가 으스러질 만큼 고통스러운 아픔을
미친 듯이 참고 또 참았다.
통증이 극한에 다다르면 ‘아프다’라는 말도,
눈물도 나오지 않는다.
이를 악물고 참았지만, 한계를 느꼈다.
‘내 삶이 여기서 끝나도 받아들여야겠다’라고
체념하는 지경까지 갔다.
그때 내 인생을 돌아보았다.
가장 후회스러운 점은 다음과 같다.
“좋아하는 일 한 가지를 정하고
끊임없이 단련하여 최고의 나를
만나는 순간까지 가볼걸.”
그동안 살면서 시간과 에너지, 조건이
충분히 주어졌음에도
기회와 가능성을 놓쳐버렸다.
그 사실이 죽음의 문턱에서
제일 후회스럽고 부끄러웠다.
다시 삶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전과 다르게 살기로 마음먹었다.
다음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서
나에게 큰 영향을 준 구절이다.
“산다는 것의 성질은 성적이나 숫자나
순위라고 하는 고정적인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행위 그 자체 속에 유동적으로
내포되어 있다는 인식에
다다를 수도 있다.”
“개개의 기록도, 순위도, 겉모습도,
다른 사람이 어떻게 평가하는가도,
모두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와 같은 러너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하나의 결승점을 내 다리로
확실하게 완주해 가는 것이다.
시간과 세월을 들여, 그와 같은 레이스를
하나씩 하나씩 쌓아가서 최종적으로
자신의 나름으로 충분히 납득하는
그 어딘가의 장소에 도달하는 것이다.”
예전에는 ‘왜 인생을 열심히
살아야 하는지’ 몰랐다.
이제는 안다.
생의 끝에서 스스로 만족하는
자기 자신을 만나기 위해서다.
‘삶이 다했을 때 원하는 내 모습에
닿지 못한다면 참회의 눈물을
흘리겠구나’라고 느꼈다.
‘인생을 처음부터 다시 산다면,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은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이번 남은 생에서
꼭 실현해 보고 싶다.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원하는 ‘나’로
살 수 있었는데 그렇게 살아보지 못한 채
허무하게 인생을 끝내지 않도록.
지금 이 순간에 몰입하며
최선을 다하는 시간을
차곡차곡 쌓아가다 보면,
어느 날 예상치 못한 자리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시간은 어차피 흘러간다.
그 흐르는 시간에 매일의 노력 한 방울을
꾸준히 섞는다.
같은 세월이라도 이왕이면
생의 농도가 짙은 삶을 살다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