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나는 일상에서 별거 아닌 일에도
쉽게 행복을 느낀다.
지금 눈앞에 존재하는 일들에 대해
감사를 자주 표현한다.
하지만 9년 전 아빠가 세상을 떠난 직후에,
엄마랑 나는 비처럼 눈물이 흘렀다.
그 당시, 엄마는 직장에서도 우셨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이 표정과 소리를 알아차리지 못할 때,
고개를 숙이고 몰래 훌쩍이셨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알고 나서 마음이 아팠다.
나 역시 출근하는 엄마에게 인사를 한 후,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나면
곧바로 눈물이 나왔다.
엄마와 나는 같이 있을 땐
슬픈 감정을 내색하지 않고 가슴속에 욱여 넣었다.
그러다 서로 떨어진 공간에서야
각자 눈물을 토해냈다.
27살 때, 피하고 싶은 일들이
동시에 내 삶을 에워쌌다.
그 안에 갇힌 채 웃음보다 울음을 달고 살았다.
시련 앞에서 휘청거릴 때마다 운명 탓만 했다.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왜 굳이 [나]라는 인간으로 태어나
이 숙명을 살아내야 하는 시간이 주어졌을까?
아! 울퉁불퉁한 내 운명을
바꾸고 오라는 의미구나”라고.
마치 누군가가 “시간과 기회를 줄 테니
너의 힘으로 한번 잘 해보렴”이라고 말하면서
나를 세상에 떨어트린 느낌이었다.
인생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의 영역이 존재한다.
또 그만큼 내가 바꿀 수 있는 의지의 영역도
분명히 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너를 기꺼이 운명의 여신 클로토에게 맡기고
네 운명의 실로 그녀가 원하는 베를 짜게 하라.”
박경리 작가님의 <토지>를 읽었다.
한 시대의 아픔과 희망을 보여주며,
우리 민족의 상처와 한을 그려낸 작품이다.
소설에는 600명이 넘는 등장인물이 나온다.
이들은 우리와 동떨어지지 않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이들의 삶과 죽음을 통해
‘인생을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에 대해 숙고했다.
<토지>를 읽는 내내 ‘인생은 찰나이고
허무하다’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내 의지가 미치지 못하는 차원이 있다.
수억 가지 가능성 중 ‘왜 하필?’이라고
감지할 때가 있다.
현재 내 의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인과관계가 내 삶을 드리운다.
‘나’로 태어나고 싶어서,
저 사람을 만나고 싶어서,
그 일을 겪고 싶어서,
이 시대와 공간에 살고 싶어서,
주어진 운명을 원해서 선택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토지에 나오는 등장인물 대부분 다 그렇다.
서희, 길상이, 기화(봉순이), 용이, 월선이,
홍이, 한복이 등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사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원하지 않는 운명의 굴레를 살아내는 것이
인생이구나.’라고 자각했다.
우리는 모두 운명의 사슬에 묶여 있다.
인생은 내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달리는 열차에
나를 태웠다.
지나고 보니 그 열차는 내가 꼭 도착해야 할
목적지로 데려다주었다.
힘든 시간을 잘 버티면 그 시련 덕분에
인생이 아름다웠다고 느끼는 날이 반드시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