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5 나의 것은 있다.

초예민자로 태어나 세상을 사랑하기까지

by 이너위키InnerWeaki

체력장이 예고된 날이면,

나는 이유 모를 복통에 시달렸다.

또래 여고생들은 반나절 수업을 통으로 날린다는 사실만으로도,

들뜬 마음이 입가에 새어 나왔으나,

어쩐지 나는 도망가고 싶었다.


출발선에 선 아이들과 그 찰나 허공에 떠 버린 응축된 시간.

침과 함께 꿀떡 넘어가는 긴장감이 귀에 생생히 들려왔다.

등을 달구는 한 무리의 시선이 느껴지기 무섭게,

목 뒤가 축축하게 젖어들었던 것을 기억한다.

내리쬐는 태양 때문인지 뒷 목을 서늘하게 훑고 지나가는 식은땀 때문인지는 알 수 없는,

불편한 경직을 기억한다.


출발선에 서서 튀어나가려는 몸과 줄다리기를 하며,

한 편으로는 제발 호루라기 소리가 울리지 않기를,

그때는 그저 주술이었을 신에게 빌고 또 빌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귀를 찌를 듯한 신호음보다 먼저 들렸던 것은,

흙바람을 일으키며 저 멀리 나아가는 아이들의 달음질 소리였다.

나는 그 자리에 서면 여지없이, 당연하다는 듯 낙오되었다.


물론 매번 절망을 느낀 것은 아니었다.

누구나 처음을 가두려 울타리를 치지 않듯,

내게도 처음에는 운동화 속에 작은 희망을 풀어놓았다.

저 결승선 너머로 힘껏 달려가 안겨보리라.

얼굴에 와닿는 바람을 온전히 느껴보리라.


그러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나는 한 번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평생 다할 수 있는 모든 힘을 짜내어 달려도,

앞서 달리는 이들과의 결코 좁혀지지 않을 차이를 마주하는 순간,

이 경주에서 가장 뒤처진 것은 나 밖에 없다는 비정한 현실을 마주하는 그 찰나의 순간,

나는 두 번 다시는 힘을 내지 않았다.


몸에 힘을 뺀 채로, 허나 힘을 뺐다는 것을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만,

짓눌린 몸보다 무거워진 마음을 이고 지고,

늘 고개를 숙였다.

결승선에 발이 닿기가 무섭게,

감히 선을 넘을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서둘러 자리를 이탈했다.


체육시간은 내게 절망이었다.

터질 것 같은 심장을 부여잡고 달려도 마지막 남은 한 바퀴를 마저 돌 시간을 주지 않았던 오래 달리기처럼,

당차게 팔에 힘을 주고 던져도 공은 늘 손끝에서 뚝 떨어져 버리기만 했던 피구처럼,

애쓰기가 무섭게,

나의 노력은 언제나 거부당했다.


그저 남들과는 너무도 다른 존재라고만 여기며 자책했던 나의 어린 시절엔,

내가 견디지 못하는 것이 작열하는 태양 아래 타들어가는 나의 피부였는지,

흘러내린 땀으로 끈적하게 달아오른 불쾌감이었는지,

나의 인생 속에 결코 따라잡지 못할 간극을 발견했다는 절망이었는지,

그것도 아니면 구경하던 이들의 눈동자에 비친 바보 같은 내 몸뚱이에 조소를 보낸 것이 다름 아닌 나였다는 사실인지,

정말 알 수가 없었다.

정말로.




네가 살 집은 있어.

네 집은 반드시 있어.

그러니 걱정하지 마.

- 우리 엄마 -




서울로 이직해,

제주에서 어플로 미리 서울 자취방을 알아보던 때는,

제주에 보금자리를 너무도 쉬이 구했을 때처럼,

집을 찾으러 나가는 순간 나의 것이 있을 줄 알았다.

첫 집을 구경할 때까지는. 적어도.


내 예상보다 서울의 집은 훨씬 삭막했다.

다리만 뻗으면 꽉 들어차고 마는 좁은 공간을,

감히 집이라고 불러야 할 지도 혼란스러운 순간에,

내 조건으로는 이것이 최선이라고 말하는 담백한 말 한마디가,

나의 허락도 없이,

나의 인생의 일부분을 도려내는 듯했다.

감히 나는 줄 생각도 없는 희생을 요구하면서.


세 번째 부동산을 돌 때 즈음,

가장 좋은 집이라고 보여 준 곳에 실망하고,

모든 기대를 내려놓고 차를 타고 다음 집으로 이동하다,

멍하니 차창 너머로,

이상하게 마음을 편하게 하는,

낯선 언덕을 보았다.


가파른 언덕 위로 작은 산이 보였다.

아래의 왁자지껄한 소음에서 벗어난,

한적한 언덕의 끝자락.

그 끝이 이상하게 위태해 보이지 않았다.

그 사실이 처음 본 낯선 언덕보다도,

더 이상했다.


이곳에 살면 좋겠다,

중얼거리는 말에,

여긴 비싸죠,

단념했다.


터벅터벅 지친 마음과 몸으로 돌아온 본가에서,

제주로 돌아가고 싶다,

서울은 너무도 치열하다,

무기력하게 누워 있는 딸에게,

엄마는 한 치의 걱정도 고민도 없이 말했다.


네가 살 집은 있어.

네 집은 반드시 있어.

그러니 걱정하지 마.


의아했다.

단순히 나를 위로하려는 말일까,

저 단호함은 무엇에 기반한 것일까.


그렇게 다섯 번째, 여섯 번째, 수없이 많은 집을 스쳐 지났다.

사기를 당할 뻔한 집을 지나쳐,

실망과 절망의 굴레를 돌며,

지친 몸을 이끌고 마지막으로 들러 본 중개사 분과도 여지없이,

몇 번이고 허탕을 쳤다.


이런 곳에 살다가는 정신병이 오겠다,

서울의 젊은 혹은 나이 든 이들이,

얼마나 쉼이 없이 살아왔을까,

나의 몸뚱이로 꽉 들어찬 이 좁은 곳에,

마음 뉘일 자리가 없어,

몇 번이나 마음을 구겨야 했을까,

어지러워 서둘러 집을 빠져나왔다.


이제 그만 집에 갈까,

뜬 마음을 잡을 기력조차 없이 돌아서는 그 순간,

마음에는 안 들 텐데 한 곳이 있기는 해요, 가볼래요?

하는 그 담담한 말에,

오늘은 이곳이 마지막이다,

마음을 닫고,

뒤를 따랐다.


그리고 그 중개사 분의 뒤를 따라 올라가며,

눈 앞에 펼쳐지는 이상한 기시감에,

눈동자를 굴려댔다.


여기, 어디서 많이 본 곳인데.


낯익은 가파른 언덕,

가파르나 위태롭지 않은 끝자락.

그리고 집을 보는 순간 알았다.

나는 이 집에 살겠구나.

그리고 엄마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네 집은 반드시 있어.


그래, 그 말이 맞았다.

내 집은 반드시 있었다.



나는 지금 발레를 배우고 있다.

제주도에서부터 시작한 발레에 푹 빠져,

유연해지고 체력이 붙은 나의 건강하고 아름다운 신체를 바라보며,

어쩌면 평생 죽는 날까지 하게 될 마지막이자 유일한 운동이 발레이기를 바라고 있다.

십 년만 더 일찍 시작했으면 좋았을 거라고 아쉬워하며.


예민한 내게,

일평생 이렇게 딱 맞는 운동을 만난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발레는 나의 일부가 되었다.


손끝과 발끝의 정교함이,

허벅지를 끌어올리는 발버둥이,

엉덩이를 조이는 힘이,

윗선으로 향한 가슴이,

닫힌 갈비뼈가,

있는 힘을 짜내 돌린 발 뒤꿈치가,

아래로 잡아당긴 날개뼈와 어깨가,

높이 끌어올린 정수리가,

나의 모든 신경과 힘을 요구했다.


서로가 각자의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 모순 속에서,

한 치의 양보를 할 수 없이 팽팽히 맞선 서로의 힘들이,

나의 예민한 신경을 애걸했다.


하나를 빚어가는 과정이,

그 하나와 하나들이 모여 빚어내는 조각 같은 아름다움이,

단순히 체력을 기르는 운동이 아닌,

지난날 아이들의 눈에 비친 아둔하고 바보 같았던 몸짓에 대한,

어른날의 내가 줄 수 있는 보상 같았다.


땀 흘리기를 그렇게도 싫어했던 내가,

숨이 차서 어쩌면 가라앉아 죽을지도 모르겠다고 두려워하며 그만둔 수영과,

고등학교 시절 무작정 살을 빼겠다는 일념 하나로 시작했으나 지루함에 그만둔 홈트레이닝과,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달리며 황홀해했던 조깅마저 어느샌가 시들해진 내가,

발레만큼은 설렘과 기대함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사람에게는 어쩌면 저마다의 기질에 맞는 운동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평생 어떤 운동을 이토록 애타게 그리워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퇴근 후 하러 갈 발레를 기다리며 설렘을 참아 내는 순간,

레슨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계단을 발레 점프를 하듯 가볍게 내려가는 순간,

사람들과 산책하는 길에 턴아웃으로 발을 뻗으며 걸어가는 순간,

자기 전 완벽한 자태로 바워크를 하는 발레리나 영상을 봐야만 마음이 안정되는 그 모든 순간이,

내 인생에 찾아오리라고는 결코 예상하지 못했다.


지금의 내 모습을,

결승선에 서 있던 그 시절의 내가 보고 있다면,

무어라고 할까?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내 것은 없어 보이는 것들 사이에서도,

나를 위해 만들어졌다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평생을 이고 지고 가고 싶은 영혼의 동반자와 같은 나의 것이,

운동이 되었든, 언어가 되었든, 직업이 되었든, 취미가 되었든, 책이 되었든, 사람이 되었든, 소명이 되었든, 연인이 되었든, 집이 되었든, 나 자신이 되었든,

반드시,

반드시 언젠가는,

간절히 바라고 원한다면,

에라 모르겠다 배짱을 두둑이 불려 놓고 찾아 나서길 거부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인생 한 모퉁이에서 맞닥뜨리게 될 거라는 걸,

나는 그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였다는 걸 전하고 싶다.


나의 것은 있다.

나는 반드시 만나게 될 것이다.

참고 기다리면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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