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협한 노벨문학상 해설

꼭 교과서대로 해석해서 읽을 필요는 없잖아?

by 흩날림문고


나는 신기하게도,

인생에서 내 삶을 관통하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느낄 때면,

아니, 어떨 때는 그 필요를 자각하지 못한 순간에조차,

그 순간 내가 읽고 있던 바로 그 소설이,

연금술사에서 말하는 그 '지표'가 되어주었다.


한 줄로 정리할 수 있는 그 지혜를,

책을 다 읽고 난 후,

책의 맨 앞에 적어 놓았다.


죽을힘조차 없어,

주술을 외듯 죽여달라는 말을,

입에 되네였던 그 순간엔,

아무 생각 없이 서점에서 집어 든,

'미드나잇 라이브러리'가 지표를 제시했다.


또,

왜 세상에는 이렇게 많은 전쟁이 일어나는지,

우리는 왜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지,

신은 무얼 하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때는,

임레 케르테스의 '운명'을 우연히 읽고 있었다.


수많은 우연과 어쩌면 운명은,

어쩌면 로맨틱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야기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나를 위해,

운명은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말을 걸어왔다.


문학이 나를 살리기도 했고,

문학이 나를 야단치기도,

문학이 나를 성장시키기도 했다.


나는 문학과 함께,

평생을 품었던 질문을 놓고 씨름했다.

그와 함께 고민하고, 답을 찾았다.

때로는 문학과 단 둘이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나에게 문학은 기도이자,

위로이자, 지표이자, 숙명이자, 구원이었다.


그렇기에,

나의 문학은 편협하다.

그건 필연적인 것이다.


내가 문학을 나의 개인적인 운명으로 소비하기에,

문학이 건넨 지혜를 오롯이 나의 것이라 주장하기에,

나의 문학은 객관적일 수가 없다.


심지어,

나는 하나의 책을 읽을 때,

그 책과 어울리는,

가사 없는 노래를 페어링 해서 읽는다.


그 책을 읽을 때는,

주궁장창 그 노래만을 듣기에,

반대로 그 노래를 듣는 순간,

불현듯 그 책을 읽을 때의 나의 모습이 떠오른다.

나는 음악에 박제된 나의 문학을 사랑한다.


나는 내가 사랑했던 나의 문학,

특히나 내가 사랑했던 노벨문학상 책을,

지극히 편협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왜 하고많은 책 중에 노벨문학상이냐,

권위의 추종이,

'편협하다'는 단어를 비겁히 둘러쓰고,

내면에는 전문가가 되고자 하는,

나의 어리석은 욕망을 드러낸 반증이 아니냐,

하고 묻는 이도 있을 것이다.


별다른 이유는 없다.

그저 세계사와 비극에 관심이 많은 내게,

유독 노벨문학상의 대의(大義)가 눈에 띄었고,

그런 류의 글을 읽는 것이,

내게 평안을 주었을 뿐이다.


그리고 문학을 비교적 늦게 접한 나조차도,

노벨문학상 수상작을 읽을 때면,

이걸 왜 지금에서야 보게 됐을까 하는 아쉬움이,

읽는 내내 한숨이 되어 흐른다.


새로운 경험이라는,

비교적 안정적인 도파민을 찾아 헤매는 내게,

지속가능한 자극을 제공해 주었기 때문이라고,

보다 솔직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

학계적인 해석이나,

적어도 전문가 비스무리한 논평을 기대했다면,

읽지 않는 것을 권한다.

지극히 편협하므로.


그러나 만일,

문학이 한 개인을 어떻게 살렸고, 살리고 있는지,

한 개인의 사고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호기심이 든다면,

지극히 편협한 나의 노벨문학상 해설로 초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