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외1_미드나잇 라이브러리, 매트 헤이그
https://www.youtube.com/watch?v=1fUVUImzqMk&list=PLkx5B7hwVFlF23a5JJWQcO36jAwZQYpXB
제주에 입도하기 전,
나는 새해를 맞아 이런 기도를 올렸다.
어떤 고난과 역경에서도,
평안과 기쁨으로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누리는 한 해가 되길.
그리고 나는 제주에 터를 잡았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지속되는 태움과 고립된 제주에서의 외로움에,
몸과 마음이 나동그라졌다.
제주에 와서는 매일 원망하고 울며 물었다.
내가 왜 살아야 하느냐고.
나의 삶의 의미는 뭐냐고.
제주를 포기하고,
서울에 가겠다 마음먹은 그때,
나는 마지막 힘을 내어 서점에 들렀다.
그리고 책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이 책은 나의 시발점이 되었다.
책을 향한 여정.
드라마 시나리오에서 소설로의 전환점.
책이 지표가 되어 내게 말을 걸기 시작한 시점.
행복해지기 위해서
포도밭을 소유하거나
캘리포니아 석양을 봐야 할 필요는 없다.
심지어 넓은 집과 완벽한 가정도 필요치 않다.
그저 잠재력만 있으면 된다.
그리고 노라는 잠재력 덩어리였다.
"포기하지 마라!
감히 포기할 생각은 하지도 마, 노라 시드!"
'나는 살아 있다.'
책이 살아 있다는 감각.
책은 죽어있지 않았다.
살아 내게 말을 걸었다.
아무런 생각 없이 서점에 들렀다,
표지가 아름다워 우연히 집어든 책은,
내게 불완전한 잠재력이 있다 속삭였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망설였다.
미국에서 썼던 드라마 대본 속 여자 주인공은,
이런 대사를 읊었다.
사르트르는 말했다.
인간은 세상에 피투 되어 기투하는 존재.
아무런 목적 없이 세상에 내던져졌고,
또다시 미래로 몸을 던져야 하는 존재.
불완전한 나의 선택이
모호한 인생을 채우는 전부라면,
나만 두려운 걸까?
사람들은 이 두려움을 어떻게 견디는 걸까.
더는 자신의 고통에서 달아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상상하는 완벽한 모습이라는 독으로
스스로를 죽이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상처를 보고 인정할 것이며
자신에게 박탈된,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긍정적이고 행복한 삶이 있다고
상상하지 않을 것이다.
처음으로 삶의 어두운 면을 받아들일 것이다.
실패가 아니라 전체 중 일부로.
다른 것들을 돋보이게 하고,
성장시키고,
존재하게 하는 무언가로.
흙 속의 거름으로.
소설은 내게 작은 실마리를 던졌다.
그것도 늘 상상조차 못 하는 방식으로.
내가 기대했던 답변은
'너는 인권의 한 획을 긋는
국제기구에서 일하게 될 거야' 라든가,
'세상을 들었다 놨다 하는 드라마 작가가 될 거야'였다.
그러나,
우연히도 만난 이 책을 통해,
어쩌면 나의 신은 말했다.
살아있다는 것은
불완전함 속에 놓여 있음을 의미하지만,
수많은 가능성 한가운데에 서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 모든 잠재력을 지닌 나는,
살아 있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2년 전,
나는 그 말을 딛고 일어섰다.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세 번, 네 번, 수차례에 나눠서.
나는 인생이 나를 이끌고 가는,
그 두려운 암흑 속으로,
두 다리를 벌벌 떨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그곳엔 평생을 그리워할 만큼,
과분하게도 행복했던 천국이 놓여 있었다.
며칠 전,
나는 꿈을 꾸었다.
제주에 돌아가는 꿈.
지금의 나는,
발가벗은 듯 순수했던 그때를 그리워하고 있다.
물론, 다시 돌아가라면 그러고 싶지 않다.
그러나,
2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여전히,
나의 내면 깊은 곳에서는,
답을 듣고자 북을 두들긴다.
나는 남이 시키는 대로 살아가는 존재인가,
평생 먹고살기 위해 죽도록 일해야만 하는 존재인가,
내게도 제주에 살던 시절과 같은
여름밤이 다시 찾아올까,
매 순간 행복하다는 감사를 터트리는 현재가 올까.
과거에 나를 소생했던 이 책은,
돌아보는 현재와 미래를 또다시 건드린다.
살아있다는 것은,
정해지지 않은 불안 위를 평생토록 걷는 것이다.
그렇기에 무엇이든 가능하다.
그것이 살아있다는 감각이다.
나는 감사를 빌려오기로 했다.
지금의 모든 순간을 빌려온 감사들로 값을 치르겠다.
또다시 날아오를 나를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