ÉP. 9 연어 리예트 시금치 타르틴

RILLETTES DE SAUMON & ÉPINARDS

by 흩날림문고
친구가 너무 잘 찍어놔서 우려먹게되는 사진


보직을 옮기고,

평균 일주일에 3~4일을 야근하게 되면서,

점차 나는 나를 챙기기를 귀찮아하게 되었다.


퇴근하며 무엇을 해 먹을까,

즐거운 고민에 빠져 마트로 달려가던 나는,

모든 게 귀찮고 의미가 없어,

회사 탕비실에 구비된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낮에 요리하다 남은 재료로 대충 만든 것 같은,

구내식당에서 배를 채우기 급급했다.


한 달을 넘게 이런 생활을 지속하다 보니,

사는 것이 어쩐지 너덜너덜해졌다.


나의 가치를 따라 사는 것을 차치하더라도,

사는 게 재미가 없었다.

먹고, 글 쓰고, 책 읽고, 발레 하고, 기도하는 것이,

인생의 가장 큰 즐거움이었기에,

회사와 집, 그리고 지하철에 갇힌 나는,

더 이상 웃는 것조차 에너지가 들었다.


그러다 문득,

더 이상은 이렇게 살 수 없겠다,

현재를 담보로 잡은 미래가,

어쩌면 아예 사라질지도 모르겠다,

그런 두려움이 자라났다.


나는 다시 부지런해지기로 했다.

당장의 환경을 바꿀 수 없다면,

다시 타르틴 책을 펴겠다고.

회사로 나의 타르틴을 가져가겠노라고.


햇살이 제법 따스한 11월의 일요일,

나는 미리 시켜 둔 재료를 꺼냈다.

다음 주 내내 나를 먹일,

타르틴 재료를 만들어 놓기 위해.

내가 애정하는 티팟과 홍차들도,

모조리 회사로 가져가야지.


비록 나는 당분간은 야근의 굴레에서,

감히 벗어날 생각도,

바꾸고자 하는 용기도 내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한 시간의 저녁 식사시간을,

오롯이 나만의 시간으로 만들어 내려한다.


다시 타르틴을 만들어 먹고,

차를 마시고,

그렇게 나를 귀하게 먹이고 달래며,

나도 무엇인지 모를,

나의 갈망이 채워지는 때까지.


어쩌면 소설작가일 수도,

아니면 국개협에서의 커리어일 수도,

그것도 아니면,

꿈꾸지 못했던 전혀 다른 길일수도 있는,

미래에 도달하기 위해,

나는 오늘의 나를 먹이려 한다.




연어 리예트 시금치 타르틴
RILLETTES DE SAUMON & ÉPINARDS


사실 만찬 때 친구들에게 해주고는,

너무 맛있어서,

오랜만에 다시 만들어 먹었다.

역시나. 기대를 더 띄워주는 맛이었다.


먼저, 생연어.

쿠팡에 저렴한 생연어가 많다.

어느 것이든 생이면 상관없다.

연어는 어째서 이렇게 맛있나.


다음, 시금치.

시금치를 좋아하게 된 때가 언제인가.

어릴 적 유일하게,

김밥에 들어간 시금치만 허락했던 나는,

시금치 나물이 좋아지는 나이가 되어버렸다.


생으로 썰어 올린 시금치가,

이리도 향긋할 줄이야.

사람이 나이가 들어갈수록,

맛을 이해하는 나이도 먹어가는 걸까.


그다음, 리코타 치즈.

리코타 치즈에 찐 연어를 섞어,

바게트에 올려 먹고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다른 것도 섞으면 되는구나.


언젠가는 나만의 레시피를 만들고 싶다.

어쩌면 작은 기출변형에서 출발할지 모르나,

결국엔 나만의 색다른 맛으로.


마지막, 잣.

내가 언제 이렇게 사소한 디테일에,

시간과 돈과 품을 들여 본 적 있나.


매번 참 가성비와 효율을 따지며 살던 내가,

있어도 없어도 그만일,

잣 하나를 볶아 얹을 때,

그 작디작은 알알들이 또 하나의 풍미를 더할 때,

모든 것은 다 버릴 것이 없으니,

사소함을 사소하게 치부하지 말자고,

그런 작은 생각들을 하며 볶아본다.




연어의 담백함과 치즈의 고소한 풍미에,

시금치의 풀내와 구운 잣의 어우러짐이,

입안 가득 만족을 채운다.


세상의 다양한 레시피들을 마주칠 때,

특히나 그 맛이 알아온 이상의 것들일 때,

이상한 황홀감이 든다.


오늘도 나를 잘 먹였다는 만족에서 오는 황홀감.


어쩌면 나의 세계가 비좁았을 수도,

나의 손을 거쳤다는 호평이 얹어진 것일 수도,

아마추어라는 낮은 기대가,

미각을 마비시켜 버린 걸 수도 있다.


하지만 여전히,

하루를 살아내기 바빠,

대충 끼니를 때우는 지친 이들에게도,

이 맛들을 전해주고 싶다.


그것이 어떤 방식이 될지는 모르나,

어떤 날들에는 그럴 수 있기를 꿈꾸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Ép. 8 하몽 토마토 타르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