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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권의 책을 읽어도
세상이 바뀌지 않는 이유

책읽기에 대해

천 권의 책을 읽어도 세상이 바뀌지 않는 이유     


“천 권쯤 책을 읽었는데도  세상이 바뀌는 게 없네”

예전 어떤 분이 내게 한 말이다. 연배도 나보다 있으셨고, 직급도 높았던 분이라 내가 뭐라 말씀드릴 입장이 아니라 그냥 웃고 말았다.

그런 경우가 있다. 뭔가 노력을 한 것 같은데 결실이 없는...     


가끔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을 보게 된다. 국내 성인 평균 독서량이 연간 7.5권(2019년 국민독서 실태조사 보고서)이라는 시대에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또 한 편으로는 가끔 ‘읽어도 너무 많이’(?) 읽는 분을 볼 때 의심이 가는 것도 사실이다. 연간 몇백 권을 넘나드는 분들도 종종 있다. 독서가 취미라 할 정도면 수긍이 가면서도 한편, 과연 그게 제대로 된 책 읽기일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예전 송나라 시인이자 학자인 구양수는 학문을 하는 태도로 그 유명한 삼다(三多)를 언급했다. 이 삼다(三多)는 또한 책을 대하는 태도로서도 적합하여 많이 인용된다. 바로 ‘다독(多讀), 다작(多作), 다상량(多商量)’이다. 많이 읽고, 많이 써보고, 많이 헤아린다(때로 토론 등을 통해 생각을 교류하는 것까지 포함)는 의미로 알려져 있다.

개인적으로 책을 대하는 태도로 이만한 것이 있을까 싶다. 우리는 흔히 ‘읽지만, 잘 쓰지 않고, 깊이 생각해보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되면 책은 스쳐 가는 바람일 뿐이다.      

책을 제대로 읽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럼 현대에서 책을 읽는 자세는 어떤 것일까? 몇 년 전 독서법과 관련해 한동안 히트했던 책이 박상배님의 ‘본깨적’이었다. 

‘저자의 관점에서 보고’, ‘나의 입장에서 깨닫고’, ‘개인이나 회사 입장에서 적용’해보는 책 읽기로 ‘쓰는 것 대신 적용’이 들어갔으나 맥락상 구양수의 삼다(三多)와 유사한 부분이 많다.     


내 책읽기의 관점을 보니 묘하게 과거와 현대의 책 읽기에 대한 이론들이 합쳐져 있다. 솔직히 이건 이분들의 이야기에 영향을 받은 덕분도 있겠지만 실상 자연스럽게 내 안에 자라난 책 읽기의 관점이기도 하다.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해 헤아려 보고, 많이 써보고, 실제 내 삶에 적용해 본다’는 것이다.

내게 ‘읽는 것’은 기본 자원을 채우는 행위이고, ‘생각하는 것’은 저자와 나의 관점을 비교하고 한편으로는 위로를 얻고 필요를 채우는 것이다. 다음의 ‘쓰는 것’은 내 속의 생각과 욕구를 풀어내고 정리하는 행위이며, ‘적용’은 앞서가는 이의 지혜를 빌어 실질적인 내 삶의 개선을 도모하는 행위인 셈이다.     

다만, 이럴 때 유의해야 할 것이 내겐 '많이 읽기'에 집착하다 ‘바람처럼 스쳐 가는 책 읽기’가 되는 것이다.  

아마도 예전엔 책을 한동안 그렇게 읽었던 때가 있었던 것도 같다. 연간 몇 권이냐가 중요했지 그 책이 내게 뭘 남겼느냐는 뒷전이던 때가...


앞서 얘기했던 그분의 말씀엔 두 가지 측면에서 아쉬움이 있을 듯하다. 

첫째, 당연하게도 일단 책이 바꿀 수 있는 건 책을 읽는 사람이지 세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렇게 바뀐 사람만이 세상을 바꿀 뿐이다.  

두 번째로는 책에 대한 충분한 헤아림과 그 지혜를 자신의 삶에 적용하려는 노력이 따랐어야 할 것인데 그 점에서는 어떠했는지 궁금하다.      


다른 미디어에 비해 책은 ‘생각할 수 있다’는 기능에서 독보적이다. 일방적 수용이라면 책은 TV나 다른 영상에 비해 부족한 도구로 남을 뿐이다. 그러니 제대로 읽고 내 삶에 이어붙여야 한다. 한 권의 책이라도 피가 되고 살이 되게 말이다. 간단하지만 독서 노트를 쓰는 것도 실은 이런 맥락일 것이다.

‘책이 사람을 바꾸고, 그 사람이 세상을 바꾸는’ 경우는 그런 노력속에 나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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