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경력관리
‘희망퇴직’이라는 말을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희망’이라는 찬란한 단어가 왜 거기에 들어가야 하는지 모르지만, 희망퇴직은 최근 기업체가 아직 충분히 일할 연령대의 직원들을 회사에서 밀어낼 때 가장 흔히 사용되는 단어다.
이 용어는 일단 정의 자체가 이중적이다. 네이버 국어사전을 보면 ‘본인의 의사에 따라 퇴직하는 일. 또는 사용자가 인원 감축을 위하여 종업원에게 퇴직 희망을 물어 해고하는 일’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가만히 보면 이 정의가 꽤 웃긴다. 본인의 의사에 따라 퇴직을 하는 것은 이해가 간다. 그런데 ‘퇴직희망을 물어 해고’를 한다는 말은 또 무슨 말일까?
퇴직 관련 이슈가 발생할 때 대기업이나 외국계 기업에서 함께 병행하는 것이 전직지원 서비스다. 희망퇴직의 대상자들에게 세상에 다른 대안도 있음을 함께 알려주고, 그들이 희망퇴직 후 자립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라는 의미의 서비스다. 2020년 5월부터 1,000명 이상의 재직자를 가진 기업에서 비자발적으로 퇴사하는 50세 이상의 근로자가 있으면 의무적으로 진행을 해야 하는 서비스이기도 하다.
예전에도 희망퇴직은 있었고, 나는 15년의 시간동안 다양한 직장인들의 이야기와 그들을 둘러싼 기업의 태도를 가까이서 보곤 했다.
희망퇴직에서 기업이 가장 골머리를 앓고 있는 것은 한 가지다.
바로 ‘정작 회사를 떠났으면 하고 바라는 이들은 떠나지 않고,
젊고 역량 있는 인재들이 오히려 퇴직을 신청하는’ 현상이다.
10년도 더 지난 기억이지만 인상적이었던 에피소드가 있다.
당시 외국계 한 곳에서 전직 신청 상담을 진행해 달라는 요청을 받아 회사에 상담을 하러 갔다. 그곳에서 나는 두 개의 상담 희망자 리스트를 받았다. 지금 같으면 소송이 걸릴 일이지만 초창기 좀 심한 회사들은 희망퇴직 관련 전직 상담을 할 때도 대상자와 비대상자를 미리 구분해 알려주거나, 좋은 자원은 신청을 받아도 아예 신청 자체를 묵살하기도 했다. 어떻게든 물망에 오른 대상자만을 걸러내려는 시도였는데, 그 회사도 요구가 명확했다.
A 리스트의 사람들은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열심히 하라’는 방향으로 유도해달라는 부류였고, B 리스트의 사람들은 ‘최대한 전직에 참여할 수 있도록 얘기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대상자들의 반응은 정말 놀라웠다.
A 리스트의 사람들은 대부분 “그럼 내가 지금 나가면 어느 정도의 평가를 받을까요?”, “어떤 곳으로 갈 수 있을까요?”, “이직하려면 어떤 준비를 더 해야 할까요?”와 같은 반응을 보였다. 반면, 회사의 기대와는 다르게 B 리스트의 사람들은 대체로 한결같은 반응을 보였다. “나는 죽어도 회사 안 옯깁니다.”, “나는 이 회사에서 마무리를 할 겁니다. 퇴사 생각 전혀 없어요”
‘절대로 회사를 떠날 수 없다’란 말의 이면에 들어 있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그들 역시 어느 정도 회사의 온도차를 느꼈을 것인데, 회사에 대한 감정이 상할 대로 상한 그들이 ‘회사를 너무 사랑해서’ 떠날 수 없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면 무엇일까? 흔히 얘기되는 것은 ‘자존심이 상해서’다. 아쉽게도 이런 경우조차 ‘자존심을 회복하고’ 떠나게 되는 경우는 흔치 않다. 더 험한 꼴을 보다 결국은 ‘망할 놈의 회사’에 등을 돌린다. 트라우마가 남을 수밖에 없다.
회사를 떠날 수 없는 또 다른 사유는 좀 더 솔직한 것, 그리고 좀 더 현실적인 것으로 ‘이제 와서 이만한 대우 받으며 갈 곳이 없다’는 이유도 있다. 실은 이것이 훨씬 많은 경우를 차지한다.
40대 중반 이후의 관리직, 특히나 지원부서 관리자들은 퇴직 후 고용시장에서 애매한 포지션이 될 수밖에 없다. 자신이 다녔던 곳이 남들이 선망하는 대기업이나 외국계였다면 더 그러하다. 그만한 수준의 조건을 맞춰 줄 회사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들에겐 특별한 핵심역량의 부재가 눈에 띄는 경우가 많다. 일반적인 관리 업무 수준의 일만을 하다가 나왔다면, 혹은 그저 그런 업무역량만을 닦았다면, 그동안 자신과 주변을 둘러싼 인적 네트워크를 관리하지 못했고, 의미 있는 평가를 받지 못했다면 좋은 일자리로의 진입은 쉽지 않다.
그러니 그들은 스스로 ‘회사를 버릴 수’ 없다.
때로 온갖 모욕을 감내하면서 이른바 ‘버티기’ 모드에 들어가게 된다. 가끔 스스로에게 ‘나는 저성과가 아니라 저평가를 받은 것이다’라는 위안을 하지만 과정이야 어떻든 결과는 ‘버티기 혹은 매달리기’에 다름 아닌 내용이 된다. 강력한 노동법이 있다 해도, 대놓고 자신을 원치 않는 회사에 머물려면 보이지 않는 수모를 견뎌내야 한다. 그것은 때로 ‘밥을 위해 스스로의 자존감을 좀먹어가는’ 과정이 되기도 한다.
회사를 사랑하는 것과 언제든 떠날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관점은 다르지만 의외로 결과는 비슷하다.
그 준비는 회사에서 당신을 지켜주는 강력한 방패가 된다. 어디서든 환영받는 이를 내 회사만 거절할 리 없다.
당신의 연인은 냉정하다. 연인의 선한 연민에만 기댄 일방적 관계는 종래 나쁜 그림의 ‘결렬’로 이어질 뿐이다. 이제는 스스로 냉정하게 자문해 봐야 한다.
‘나는 떠날 수 있는 사람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