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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하 Mar 14. 2021

단단한 것은 유연한 것을 기른다

3월, 자유로운 봄을 맞이하는 소회

 계절의 변화를 민감하게 느끼며 사는 삶만큼, 충만한 삶은 없다. 아예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그저 계절이 옷을 갈아입는 과정을 고요히 응시하며 하루하루를 그저 보내는 그런 삶. 그런 삶을 살아본 적이, 있던가? 있다면 나는, 그것을 '행복'이라 부르고 싶다.


 하릴없이 땅만 파고 놀던 유년 시절, 내게 있어 '시간'은 거의 무한대로 느껴졌다. 시간은 지루하게만 흘러갔고, 몇 번의 개학식과 종업식을 반복해도 여전히 초등학생이었던 그때, "시간은 참 천천히 흐르는 것이로군." 했다. (인생에서 유일하게 해맑을 수 있는 이 시절이라니!) 그러나 어른이 된 후로 시간은 영영 '해야만 하는 일'이란 네임택이 붙은 시한폭탄 안에 갇혀버렸고, 태어남과 동시에 켜진 '죽음', 혹은 '늙음'을 향한 카운트다운은, 살아가는 내내 나를 초조(焦燥)로 몰아붙였다.


 행복하고 싶다, 오로지 행복에 대한 욕망 하나로 그 모든 불안과 압박을 버티며 살아왔지만, 행복은 어떤 장면에도 머무르는 법이 없이, 나도 모르는 새에 휙 하고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나면, '아 그게 행복이었구나!' 하고 땅을 치게 만들었다. 행복 추구에 대한 욕망마저 잊어버리고 '지금 이 순간'과 하나가 되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라는 노승(老僧)의 가르침(프랑수아 를로르,「꾸뻬 씨의 행복 여행」 속 인물)은, 역설적이게도 행복은 영원히 손에 잡히지 않는 무언가임을 암시한다. 순간은 영원히 붙잡을 수 없고, 변덕스러운 사람의 마음은 구름이 흩어지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한 순간에 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연 속을 거닐며 시간이 흘러가는 모습을 고요히 응시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적어도 그 시간 동안에는, 분명히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행복의 다른 말은 '내가 살아 있음을 생생하게 느끼는  순간' 테니까. 그리고 살아있음은 오감으로 온다. 스치는 바람의 촉감, 지저귀는 새의 소리, 눈부시게 푸르른 하늘, 촉촉한 흙의 냄새...

만화 영화 <소울> 중 한 장면


 삼 월 중순의 오후 두 시, 느지막이 동네 뒷산을 오르며, 나는 봄을 만끽했고, 행복했다. 찬란한 계절을 만끽할 새도 없이 숨 가쁘게 달려온 과거의 시간들은 잠시 접어두고,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압박 없이, 누군가를 만나야 한다는 불안 없이, 계절이 나를 관통하고 있음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이 나날들이, 그저 행복하고 감사할 뿐이다. 그리고 봄은, 절대로 저절로 오지 않는다는 것을, 딱딱한 가지 끝에 피어난 새순을 보며 깨닫는다.


 겨울 산책길에 보았던, 죽은 듯 보였던 암갈색 나무들은 어느새 땅 밑에서부터 초록빛의 생명을 끌어올리고 있었고, 딱딱하게 굳은 나뭇가지 끝에는 보송보송한 새 싹이 움트고 있었다. 부드러운 것이 단단한 것을 뚫고 올라온 것이다. 아니, 단단한 것이 부드러운 것을 틔워낸 것이다. 죽어 있던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을 틔워내기 위해 잠시 숨 고르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은 늙고, 딱딱한 것이 아니라, 강하고, 단단한 것이었다. 단단함이 있어야, 유연함도 기를 수 있다. 그래서, 앞으로는 하루하루를 조금 더 단단하게 쌓아 올려야 겠다고 생각했다. 이것저것 눈 돌리지 말고, 하루의 루틴을 잘 지켜가며, 묵묵히 나의 땅에 뿌리를 내려야겠다고 다짐해본다.

 새 봄, 언제나 봄은 사람을 새롭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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