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데르센 공모전
지독히도 추운 날이었다. 한 해의 마지막 날, 창밖에는 하얀 눈발이 흩날리고 새해 전야의 어둠이 깔렸지만, 길거리의 인파는 보이지 않는다. 잘 곳을 찾는 노숙인들과 시설 수리용 로봇 한 두 대만이 가끔 5번가를 지나갈 뿐이다.
이십 년 전만 해도 연말이 되면 강남로 5번가에는 캐롤이 울려 퍼지고, 사람들은 추위 속에서도 종종거리며 누군가를 만나러 가곤 했다. 하지만 2040년인 지금은 기상 이변으로 인해 봄, 가을은 물론이고 겨울이란 계절마저 사라져버렸다. 오직 혹서기와 혹한기만 남았다. 평균 기온 40도의 혹서기가 끝나고 11월이 되면 지구는 한 달 만에 급속도로 냉각되고, 영하 30도의 강추위가 3개월 내내 지속된다.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거리를 활보하지 않는다. 세계 공통 규격의 100층 높이 아파트에 칸칸이 배치되고, 메타버스 안에서 생활을 꾸려나갈 뿐이다. 2인 가구 기준 10평짜리 알파룸 하나면 먹고, 자고, 일하고, 운동하는 것이 모두 가능한데 어차피 미디어 장비가 갖춰진 수트를 입고 AR 안경을 착용하면 모든 활동을 스크린을 통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상현실 덕분에 실체가 있는 물건을 집 안에 쌓아둘 필요가 없으므로 집의 크기는 서서히 줄어들었다. 옷장도 책꽂이도, 그릇도 필요 없고, 수면 모드 돌입을 위한 푹신한 침대 하나와 바이탈 정수기, 운동 매트 하나만 있으면 생활이 가능하다. 그래도 간혹, 아날로그 시대의 향수를 잊지 못하는 노인네들은 종이 감촉의 책 모양을 블록을 구매하기도 하는데, 어차피 스크린을 통해 텍스트를 투영하기 때문에 눈 가리고 아웅인 셈이다. 물론 세계 최고의 부자들은 팬트하우스에서 여전히 아날로그 방식의 삶을 누리고 있다는 소문도 있으나, 메타버스가 워낙 생생하게 구현되어 있어서 일반 시민들은 별 불만이 없다.
게다가 알파룸에 사는 사람들은 먹는 일조차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구식 주방도 갖출 필요가 없어졌다. UN기구에서 10년 전, 지구 온난화의 주범으로 공장식 동물 사육을 지목하며 시민들의 생식 자체를 금지할 것을 공식 선포하였기 때문이다. 몇몇 육식협회에선 끝까지 격렬하게 저항하긴 했지만, 이미 생명유지 기술이 완성된 상태였기 때문에 굳이 고기를 통해 영양분을 섭취할 필요는 없었다. (사실 기상이변 덕분에 요리라고 할 만한 식재료를 구하는 일도 하늘의 별 따기였다.) 대신 사람들은 점점 생명유지 장치에 의존하게 되었는데 사람이 수면모드에 돌입하면 침대에 설치된 생명 유지 장치가 개인의 체내 환경을 분석하고 하루 동안 필요한 칼로리와 영양소가 담긴 알약 하나를 제조하여 기상 시간에 맞춰 머리맡에 내놓는다. 소화기관을 거칠 필요 없이 영양소가 체내에 바로 흡수되므로, 바이탈 정수기로 가끔식 수분만 보충해주면 되었다. 때문에 화장실 시설도 불필요해졌는데, 간혹 위스키에 취해서 쓸데없이 물을 많이 마시는 얼간이들이나 아파트 외부의 공용화장실을 이용할 뿐이다. 하지만 이 공용화장실은 알파룸 시민들을 위한 것이 아니고 거리의 부랑자들을 위한 시설이기 때문에 멀쩡한 시민들은 절대로 가려고 하지 않는 곳이다.
각국 정부는 혹한기와 혹서기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막대한 자금을 들여 대부분의 사람들을 알파룸으로 이주시켰다. 하지만 알파룸 생활을 위해서는 기본적인 IT소양이 있어야 했기 때문에 지능이 낮은 사람들이나 기계 공포증이 있는 사람들은 이주 준비에 상당한 시간이 소요됐다. 또한 일부 사이비 집단에서는 알파룸으로의 이주를 종교적인 차원에서 거부했는데 국가가 강제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강남로 5번가에는 종종 부랑자들(알파룸 시민들은 이들을 ‘부랑자’로 불렀다.)이 돌아다녔다.
그 부랑자의 거리위로 빨간 목도리를 칭칭 감은 소녀가 나타났다. 롱패딩을 입고 방한부츠를 신었지만 롱패딩은 소매가 다 헤져있었고, 방한 부츠는 몸집에 비해 사이즈가 커보였다. 사실 부랑자들은 눈만 빼고 온 몸을 다 옷으로 감쌌기 때문에 겉으로 봐서는 성별이나 나이를 가늠하기가 힘들다. 키가 작으면 소녀이거나 소년이었고, 키가 크면 여성이거나 남성이었다. 하지만 이 부랑자는 키가 작았고 가늘고 높은 톤의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빨간 목도리의 부랑자는 이곳 저곳을 둘러보더니 다리 밑에서 눈을 피하고 있는 노숙인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성냥하나 사시겠어요?”
다리 기둥에 기대어 앉아 고개를 수그리고 있던 노숙인은 고개를 살짝 들어 소녀의 발을 쳐다봤다. 방한 부츠는 자신에게 맞는 사이즈일 것 같았다. 노숙인은 앞주머니에서 500원짜리 동전 세 개를 꺼내 소녀 앞에 내민다.
“어...성냥 한 갑에 500원 인데요?”
소녀는 약간의 놀라움과 기대감에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노숙인은 말하기도 귀찮다는 듯이 대꾸는 하지 않고 손으로 방한 부츠를 가리킨다. 소녀는 잠시 머뭇거린다. 성냥을 팔지 못한지 3일째...성냥 판 돈을 가져가야 집에 들어갈 수 있다. 어제는 성냥을 팔지 못하고 집에 들어갔다가 아빠에게 흠씬 두들겨 맞았다. 따듯한 밥 한 그릇도 얻어먹지 못하고 다시 길거리로 내몰렸기에 오늘따라 더욱 추운 것 같았다. 배에서는 계속 꼬르륵 소리가 나고, 아빠한테 맞는 것은 너무 두렵다. 소녀는 결심한 듯이 방한 부츠를 조심스레 벗었다.
‘아빠한테 성냥을 세 개나 팔았다고 하면 오늘은 꼬옥 안아주실지도 몰라. 부츠는 부랑자들한테 뺐겼다고 잘 말해보면 맞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소녀는 노숙인에게 신발을 건네고 500원짜리 동전 세 닢을 받아 손에 꼬옥 감싸쥐었다. 오늘은 따듯한 스프를 먹을 수 있어! 소녀는 딱딱하게 굳은 몸을 빠르게 움직여 집으로 향했다. 하지만 부츠를 벗은 탓에 덧신만 신은 발은 자꾸 눈 위에서 미끄러졌고, 발은 점점 차가워져갔다. 집까지는 5km거리지만, 눈 쌓인 아스팔트길을 덧신만으로 버티기엔 무리가 있어 보였다. 소녀의 몸은 점점 굽어갔다. 한 3km정도를 걸었을 때 소녀는 더 이상 버티기가 힘들었다. 눈앞에 보이는 굴다리 밑으로 들어가 잠시 바람을 피하기로 했다. 청계천은 꽁꽁 얼어붙어있었고 그 위로 눈이 30센치는 쌓인 것 같았다. 바람이 굴다리 밑에서 불어 윙윙대는 소리를 만들어냈다. 벽에 기댄 소녀는 윙윙 거리는 소리에 정신이 아득해지고 자장가소리라도 되는 것처럼 갑자기 졸음이 몰려왔다.
‘아, 너무 춥고 배고프다...’
소녀는 갑자기 아까 팔려고 했던 성냥 한 갑이 생각났다. 성냥 대신 부츠를 팔았으니 성냥 한 갑은 자신이 써도 될 것이었다. 소녀는 성냥 한 개비를 꺼내 불을 밝혔다. 따듯한 기운이 손 주변에 퍼졌다. 하지만 이내 바람이 불어 성냥을 꺼트리고 말았다. 소녀는 스스로 바보 같다고 생각하며 주변에 굴러다니는 나뭇가지와 잎을 주워 모았다. 그리고 두 번째 성냥불을 나뭇잎에 피웠다. 타탁타탁. 나뭇잎에 옮겨 붙은 불은 바람에 위태롭게 춤을 추다가 한 번의 강풍에 휙 하고 꺼져버렸다. 소녀는 절망했다. 바람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필요했다. 빨간 목도리를 풀러 나뭇잎 주변을 감쌌다. 조심조심, 세 번째 성냥의 불을 지펴 나뭇잎에 옮겼다. 이번에는 제법 타올라서 따스한 온기가 전해졌다. 소녀는 뻣뻣하게 굳은 발을 모닥불에 쬐이며 언 몸을 녹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불은 이내 꺼졌고 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