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여행을 끝내리, 미련 없이

마왕에게 길을 묻다 2 : <민물장어의 꿈>

by 가하

<민물장어의 꿈>, 1999년


좁고 좁은 저 문으로 들어가는 길은
나를 깎고 잘라서 스스로 작아지는 것뿐
이젠 버릴 것조차 거의 남은 게 없는데
문득 거울을 보니 자존심 하나가 남았네
두고 온 고향 보고픈 얼굴 따뜻한 저녁과 웃음소리
고갤 흔들어 지워버리며
소리를 듣네 나를 부르는
쉬지 말고 가라 하는

*저 강들이 모여드는 곳 성난 파도 아래 깊이
한 번만이라도 이를 수 있다면 나 언젠가
심장이 터질 때까지 흐느껴 울고 웃다가
긴 여행을 끝내리 미련 없이

익숙해 가는 거친 잠자리도
또 다른 안식을 빚어
그 마저 두려울 뿐인데
부끄러운 게으름 자잘한 욕심들아
얼마나 나일 먹어야 마음의 안식을 얻을까
하루 또 하루 무거워지는
고독의 무게를 참는 것은
그보다 힘든 그보다 슬픈
의미도 없이 잊혀지긴 싫은 두려움 때문이지만

*저 강들이 모여드는 곳 성난 파도 아래 깊이
한 번만이라도 이를 수 있다면 나 언젠가
심장이 터질 때까지 흐느껴 울고 웃으며
긴 여행을 끝내리 미련 없이

아무도 내게 말해 주지 않는
정말로 내가 누군지 알기 위해


민물장어, 즉 뱀장어는 산란을 위해 하천과 바다를 오가는 회유성(回遊性) 어류이다. 뱀장어는 민물에서 대부분의 일생을 보내다가 산란기가 되면 바다로 떠나는데, 수심 2,000~3,000미터의 심해로 내려가 알을 낳은 후 생을 마감한다고 한다. 산란을 위해 태어난 곳으로 되돌아간다는 점에서는 연어와 동일한데,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연어들처럼>이라는 강산에의 노래처럼 연어는 바다에서 강으로 향하는 반면, 뱀장어는 강에서 바다를 향해 간다.


노래의 분위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강물의 흐름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는 어쩐지 힘차 보이고, 강물의 흐름에 등 떠밀려 바다로 향하는 장어의 뒷모습은 어쩐지 쓸쓸하다. 수명으로 따져도 연어는 5년 남짓의 생을 보내는 뜨거운 청춘이고, 장어는 10년 이상을 사는 중년으로 어느 우물에선 40년 된 장어가 발견된 적도 있다고 한다. 산란을 하지 않으면 더 오래 살 수도 있는 물고기. 노랫말을 음미하는 지면에서 이렇게 장어 자체의 특성을 설명하는 게 조금 웃기기도 하지만, 노랫말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위해서 알아두어야만 하는 사실들이다.


우선 이 노래의 제목은 <민물장어의 꿈>이며 노랫말 속 화자인 ‘나’는 ‘민물장어’로, 의인화되어 있다. 우리는 민물장어가 꿈을 이루기 위해 떠나는 여정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므로 소설로 치면 ‘여로형’ 구조라고 볼 수 있다.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 속 주인공이 무진으로 떠났다가, 다시 일상적 권태가 도사리고 있는 서울로 돌아온다는 점에서 ‘원점회귀형 여로형’ 구조를 보여준다면, 이 민물장어는 죽음을 위한 여행을 떠나고 있으므로 회귀하지 못하는 (닫힌) 여로형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다음으로 장어인 화자는 산란을 위해 ‘바다’로 향하고 있는데, 산란을 위해 바다로 떠난다는 것은 예술가가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작품을 창작해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좁고 좁은 저 문으로 들어가는 길’은 자신의 작품세계를 완성하는 것을 뜻하며, 자기 스스로도 만족할 만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 자신을 끊임없이 갈고닦아야만 했으므로 화자는 ‘버릴 것조차 거의 남은 게 없이’ 소진된 상태에 놓여있다.


이 앨범이 발매된 1999년 당시 신해철은 10년 넘게 창작활동을 해 온 터였으니 벽에 부딪힌 느낌, 스스로의 한계와 마주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자기 스스로 아티스트로서의 삶을 고집했으므로, 자존심 하나로 버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작품을 창작하기 위해서는 오로지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창작을 위해서는 가족들의 따듯한 품과 단란한 일상들을 포기해야 하므로 안식에 대한 유혹은 '고갤 흔들어 지워버리며' 쉬지 않고 길을 떠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화자는 궁극적인 이상향인 ‘파도 아래 깊은 곳’에 다다를 수만 있다면 그제야 미련 없이 삶이라는 여행을 끝내겠다 이야기한다.

하지만 안식에 대한 유혹을 뿌리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안일해지지 않기 위해 떠난 새로운 길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익숙해질 뿐이고, 스스로를 부끄럽게 만드는 게으름과 욕심들은 내적 번민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이 곡을 지을 당시 신해철은 밴드 넥스트를 해체한 후 영국과 미국 등지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있던 때였다. 국내 공연 무대의 협소함으로 인해 최정상 락밴드의 지위를 한 순간에 내려놓고 떠난 유학이었으므로, 소속사나 주변인들이 지지해줄 리는 없었다. 또한 뜸한 활동 덕에 ‘한물 간 가수’ 취급을 받았던 신해철은 그 어느 때보다 고민이 많았을 테지만, 유명세를 등에 업고 안정된 밴드 활동을 하는 것보다는 스스로를 새롭게 하는 것을 통해 자신의 음악을 업그레이드하고 싶었을 것이다.


예술가와 철학자는 인간의 유한성을 인식한다. 유한한 인생에서 자신만의 의미를 찾고, 자기 작품(혹은 후손들)을 후대에 남기고 싶은 것은 유한한 존재가 갖게 되는 공통적인 욕심이다. ‘의미도 없이 잊혀지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던 신해철은, 음악적 완성을 위해 고독의 무게를 참으며 꿋꿋이 자신의 길을 걸어갔던 것이다.

그리고 이 험난한 여행의 목적은 이런 것이다. ‘정말로 내가 누군지 알기 위한 것.’


신해철은 음악가로서 자신의 궁극을 실현하고 싶었을 뿐 아니라, 자신을 한계 짓는 것들과 계속 싸워나감으로써, 자신이란 탐험지를 점점 넓혀나가고 싶었던 것 아닐까?


앞의 글에서 다루었던 “네가 진짜로 원하는 게 머야?”라는 반복적이 질문은, 타인을 향한 물음일 수도 있지만 세상의 잡음과 끓어오르는 욕망 속에서 혼란스러워하는 자기 자신에게 던지는 날카로운 채찍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신해철은 자신이 진행하던 라디오 <고스트 스테이션>에서 <민물장어의 꿈>을 자기 노래 베스트 2위로 선정했는데, 다른 사람에게 위로가 될 수도 있겠지만 우선은 자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만든 곡이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세상에 내던져진 피투적 존재이자, 자유의지에 의해 스스로의 삶을 선택해나가는 자유인으로서의 한 인간. 왜 태어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떻게 살고 싶은지는 스스로 알아내고 선택해야만 하는 철저하게 고독한 ‘존재’로서 삶을 살아갔던 신해철.


내가 이 글을 쓰며 그에게 묻고 싶었던 것은 “나답게 사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였는데, 그의 노래 세 곡을 살펴보며 나는 그 해답을 얻을 수 있었다.


<나에게 쓰는 편지>에서 그는, 유한한 인생을 직시하고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되, 나약함 또한 자신의 일부라는 것을 인정하자고 이야기했다.


<네가 진짜로 원하는 게 머야>에서 그는, 삶의 무수한 갈등 속에서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철저하게 사색하자고 이야기했다.


<민물장어의 꿈>에서 그는, 궁극적인 자아를 완성해가는 것은 고독한 싸움이 되겠지만, ‘나’라는 것은 언제까지나 진행형일 뿐, 완성형이 될 수 없으므로 그냥 주저 없이 자신의 길을 걸어나가자고 이야기했다.


아니,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거라고, 해석하고 싶다.


10월 27일이 되면 마왕이 떠난 지 7년째다. 그동안에도 세상은 참 빨리도 변해왔다. 생명을 경시하는 의사 덕뿐에, 의료사고로 너무나도 억울한 죽음을 맞이한 그이지만, 그의 죽음에 미련을 갖는 건 그를 추억하는 사람들일 뿐. 정작 그는 껄껄 웃으며 자신의 죽음을 겸허히 받아들였을 것 같다. '미련 없이 긴 여행을 끝내고 싶어서' 철저히 자신만의 길을 걸어갔던 그이므로, 남은 사람들 또한 그의 음악과 인생을 마음에 새기며 또 꿋꿋이 살아나가는 것이 그를 진정으로 추모하는 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다시는, 뉘우침 없는 무책임한 살인자가 진료행위를 할 수 없도록 의료법 개정을 위해 목소리를 내야 할 것이다. 남은 자들의 몫은 오로지 그것뿐이다.


good bye 마왕. 당신으로 인해 세상이 조금 더- 솔직하고 다정해졌습니다.





■ 엠미디어웍스 M-Media Works의 추모 영상 : https://youtu.be/zzPP-FDPuk4

엠미디어웍스 M-Media Works의 추모 영상


■ 마지막 강의 링크 : https://youtu.be/O57iG3OOxXc

마지막 강의의 마지막 메시지


**참고로 신해철은 mbc 100분 토론에서 교사의 체벌금지를 주장하며 학교 교육의 민주화에도 크게 기여했습니다. 선생님들에게 맞고 자랐던 제가, 학생들에게 사랑의 매라는 이름의 폭력을 사용하지 않아도 되었던 것은 많은 전교조 선생님들의 노력과 신해철 님의 목소리 덕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도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도 당신만의 하루를 사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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