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층 상승을 위한 가장 공정한 방법

학교 부적응 교사의 퇴사 일기 2

by 가하

딸 셋 중에 두 명이 교사인 집. 그렇다. 우리 집 이야기이다. 우리 집은 딸만 셋인데 첫 째 언니는 서울에 있는 법대를 나왔고, 둘째 언니와 막내딸인 나는 지방 국립 사범대학을 졸업했다. 그리고 두 딸은 똑같이 임용 4수 만에 합격하여 나란히 선생님이 되었다.

지금까지 한 얘기로만 보면 남부러울 것 없는 집안인가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부모님은 평생 막노동, 붕어빵 장사, 아파트 경비원, 청소부 등의 일을 하시며 말 그대로 뼈 빠지게 딸 셋을 키워내셨다.


내가 또렷이 기억하는 나의 어린 시절 동네는 경기도 용인시의 어느 시골마을인데 집 뒤로는 '독바위'라고 부르는 집채보다 높은 너른 바위가 있었고, 집 앞마당엔 도르래가 고장 난 우물이 있어서 물을 마시려면 손수 두레박을 내려 물을 길어야만 했다. 내가 6~7살 때의 기억이다.

더 어렸을 땐 달팽이가 서식하는 비닐하우스에서도 잠깐 살았던 기억이 있는데, 나는 지금도 습기 차고 축축한 '달팽이'를 끔찍이도 싫어한다. 그 가난의 시절이 나의 피부에 아직도 달라붙어 있는 것 같아서.



지금 그 옛 동네는 백화점과 카페거리가 즐비한 광교 상현마을로 변했고, 우리 부모님은 수원의 어느 영구 임대아파트로 이사를 가셨다. 그래도 나름 도시라고 아파트에 입주하고 난 후로 우리 부모님은 한 달에 월급 70만 원씩 꼬박꼬박 나오는 아파트 경비원, 청소부 등의 일을 구하실 수 있었다. 새벽같이 나가 지친 어깨로 퇴근을 하시면 엄마의 가방 보따리에는 언제나 아파트 주민들이 먹으라고 내어 놓은 카스텔라 한 봉지, 오렌지 주스 한 병 등이 담겨 있었고, 나는 그 무거운 보따리에서 보물찾기 하듯 간식을 찾아내어 맛있다고 먹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우리 집은 정부에서 지정해준 '생활보호 대상자'의 집이었다. '생활을 보호해 준다'는 말에 국가 스스로가 부담을 느꼈는지, 그 용어는 어느새 슬그머니 '기초 생활 수급자'로 바뀌었지만, 우리 집 사정은 별로 달라질 것이 없었다. IMF가 터지던 시절,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해서 갑자기 가난해졌다는 친구에게도 나는 선뜻 어떤 위로를 건네야 할지 막막했다. 우리 집은 꾸준히, 한결같이 가난했으므로. '가난은 조금 구차해지는 것 빼고는 그래도 견딜 만 해'라고 위로를 해야 할지, '그래도 너는 평범했던 순간이라도 있었으니 좋았겠다'라고 해야 할지 어리둥절했다. 우리 식구는 작은 언니가 임용고사에 최종 합격하기 전까지 '외식'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여름휴가 때는 가족 여행 한 번 가 본 적이 없어서, 초등학생 때는 개학 후에 여행 자랑을 늘어놓는 친구들 사이에서 꿀 먹은 벙어리로 지냈다. '가난'이 참 서러운 것은, '경험'이 빈곤해지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나누는 대화에 낄 수 없다는 지점이다.


중고등학생 때는 수급자라서 받을 수 있었던 무료 급식 도시락이 일반 친구들의 '초록색'과는 다른 '주황색'이었다는 것, 어떤 담임은 부모님의 직업이 적힌 가정환경 조사서를 반장을 통해 걷어오라고 시킨 적도 있었지만, 나름대로 평탄한 학창 시절을 보냈다. (학교에서는 사실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가 별로 없어도, 공부를 잘하면 그나마 '무시'를 당하지는 않는다.)


어느덧 고 3이 되었고, 그야말로 부모님의 희생을 갉아먹고 자란 나는, 어떻게든 이 지긋지긋한 가난을 벗어나야 했고, 우리 집 수준에서 가능해 보이는 '공정한 방식의 계층 상승'은 '공무원 아니면 교사'가 전부였다.

나는 중학생이던 시절에, '평생 살면서 공무원과 교사만큼은 되지 말자'라고 스스로 다짐했던 적이 있는데, 무엇이 계기였는지는 몰라도 이유만큼은 확실히 기억난다. '발전 없이 현실에 안주하는 삶'이 멋있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내가 우여곡절 끝에 교사가 된 것이다. (이 우여곡절을 원하시는 분도 있었지만 말 그대로 우여곡절이라 이 짧은 지면에선 다룰 수가 없음을 양해 부탁드린다. 다음 기회에...)


4년 간의 임용경쟁. 어느 수험생이나 마찬가지겠지만, 그 시간은 내게 죽어 있는 시간과도 같았다. 새벽 6시면 일어나 개장시간 7시에 맞추어 도서관으로 출근을 했고, 밤늦게까지 스톱워치로 순수 공부시간 8~9 시간을 찍으며 공부를 했다. 얼굴 전체에 포진이 올라오고, 두통이 생기고, 잠을 제대로 못 자 면역력이 약해진 탓에 이런저런 질병들을 끊임없이 달고 살다가, 운 좋게, 정말 하늘의 도움으로 지원자의 상위 5%만이 가능하다는 합격의 영광을 얻을 수 있었다. 부모님이 점점 노쇠해지고 있다는 심리적 압박감을 느끼며 정말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도전한 끝에 간신히 합격할 수 있었다. '학교'라는 직장은 내겐 그런 의미였다. 학원이나 과외 한 번 없이 공교육의 힘만으로 수능을 치러내고, 사범대에 진학하고, 임용 시험을 치러 교사가 되었다. 엄마에게 합격 소식을 전하던 그 짧은 전화통화에서, 엄마의 "살았다!" 한 마디가 기억난다.


그렇게 부모님을 희생하여 힘들게 얻은 소중한 직장에서, 나는 정말 잘 해내고 싶었다.

아직도 전체 선생님 앞에서 '신규교사'라고 소개하던 그 강당에서의 첫인사가 기억난다. 그때의 나는 정말 많이 웃고 있었다. 신규 교사 연수 때 주워 들은 멋진 멘트를 기억해서 '신규(새 신新, 규범 규規)로서의 모범'을 보이겠다는 당찬 인사도 건넸다. 선배 교사들은 신규의 어리바리함과 당참이 재밌었는지 껄껄 웃었다.

그 말이 얼마나 지키기 어려운 말이었는지, 정말이지 가능하기만 하면 다시 주워 담고 싶은 말이다. 최종 합격 발표가 나고, 3월 발령을 받아 당장 아이들을 만나기까지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은 3주 정도에 불과했고, 그마저도 신규 교사 연수 1주일을 빼면, 2주의 시간밖에 없었다. 발령받은 학교에 인사를 가고 교과서를 받아왔지만, 무엇을 준비해야 할 지도 잘 모른 채로 개학이 다가왔고, 나는 그렇게 무방비 상태로 학생들 앞에 내던져졌다. 수험생활 4년 동안 묵은 피로를 채 풀지도 못한 채 나는 2학년 문과 여자반의 담임이 되었고, 곧 엄청난 고난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4부. '스승의 날의 악몽' 참고)



**지나치게 사적인 고백, 읽어 주신 분이 있다면 감사드립니다. 파란만장했던 신규 때의 추억, 4부에서 찾아뵙겠습니다. 저 또한 공교육 안에서 길러졌고, 이름 하나하나 다 기억나지는 않지만, 수많은 선생님들의 보이지 않는 노력으로 감사히도 잘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현재의 공교육 시스템은 분명히 아쉬운 지점들이 있습니다. 구시대적인 학교 시스템, 구시대적인 조직 문화 등이 개선된다면 더 좋은 '공교육'이 이뤄질 수 있을 거라 기대합니다. 모든 선생님들의 '보이지 않는 노고, 남들은 알아주지 않는 노고'에 깊이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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