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서로의 안부가 얼마쯤 궁금한가

학교 부적응 교사의 퇴사일기 5

by 가하

수업반 학생 중에 아주아주 조용한 학생이 있었다. 목소리조차 듣기 힘든, 혹은 어렵게 입을 뗀다고 해도 목소리가 너무 작아 시끌벅적한 교실에서 묻혀버리기 딱 좋은 목소리를 가진 친구였다. 표정은 항상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이 친구는 내게 있어 네 번째 유형에 속하는 학생인데 어느 날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한 반에 30명 정도 되는 학생들을 집단적으로 만나다 보면 정말 어쩔 수 없이 학생들을 부류로 나누어 인식하게 되는데(사실 여기에서부터 개개인의 존재는 지워진다.) 나는 '시간 할애 정도'의 기준에 따라 크게 네 가지 유형으로 학생들을 인식하는 편이다.
첫 번째 그룹은 학교 생활을 열심히 하고 좋은 성적을 위해 교사에게 도움을 구하거나, 단순히 선생님의 사랑을 받고 싶어서 적극적으로 교사와 소통하는 친구들이다. 자신의 존재 가치를 어떻게든 내뿜으려고 하는 열성적인 친구들. 이런 학생들은 교사가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이름을 금방 외우게 되고 금방 친근해진다.

두 번째 그룹은 다른 친구들을 괴롭히거나, 절도를 하거나 어떤 문제 행동을 해서 '학폭'(학교폭력위원회) 사안을 일으키는 학생들이다. 사실 이 친구들도 알고 보면 가정에서 제대로 된 사랑과 돌봄을 받지 못해 그렇게 된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다른 친구들에게 피해를 주는 학생들이다.

세 번째 그룹은 가정폭력을 당하거나 가출을 하거나 자해를 하는 등 가정환경이 좋지 않아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줘야 하는 학생들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친구들이 제일 안타까운데 대부분 아이들이 문제가 아니라 부모님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부모의 태도가 바뀌지 않는 이상 아이의 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

마지막 네 번째 그룹은 공부를 특별히 잘하거나 못하지도 않고, 가정환경도 평탄하여 딱히 문제 행동도 일으키지 않아 교사의 주의를 끌지 못하는 학생들이다. 나는 정말 이 무수한 '가장 보통의 존재'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할 뿐이다. 선생님이 하라는 대로 잘하고 있는데 관심은 제일 못 받는다는 것은 영업비밀이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 중에 교사의 특별한 관심을 받아보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선생님 입장에서 정말 고마운 학생에 속했다고 생각해 주면 좋을 것 같다.


어쨌든 이 네 번째 유형에 속하던 수업반 학생이 어느 날 결석을 한 것이다. 학급 출석부를 보니 '모친상'이라고 적혀있었다. 나는 순간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청소년 시절에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것은 그 학생의 개인사에 있어 굉장히 충격적인 사건일 것이다. 그런데 그 학생은 주말을 포함해 5일, 수업일수 기준으로는 3일이 지나고 나서 학교로 복귀했다. 부모나 조부모 상(喪)을 당하여 결석하는 경우에는 최대 5일까지 '출석 인정 결석(수업은 안 들었어도 수업 일수를 채운 것으로 인정되는 결석)'을 할 수 있는데, 그 친구는 불과 3일밖에 쉬지 않고 학교로 복귀한 것이다. 수업 시간에 제 자리를 조용히 지키고 있는 그 학생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난감했다. 오랜만에 돌아왔는데 모르는 척을 할 수도 없고, 아는 척을 해도 그 친구의 슬픔을 건드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나는 그냥 "OO 왔네"하고 넘어갔다. 수업은 시작되었고 그 아이는 평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특별히 슬퍼 보이지도 않고 평소와 같은 잔잔한 표정이었다. 그 아이는 정작 멀쩡한데 나만 혼자 수업에 집중을 못했다. 이런 무관심한 모르는 척의 태도가 맞는 건가 싶었다.

만약 우리 부모님이 내가 고등학생 때 돌아가셨다면 나는 정상적으로 학교에 복귀할 수 있었을까?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학교 생활을 할 수 있었을까? 당장의 내신 점수가 달린 문제이니 슬프고 아파도 수업에 집중하려고 했을까? 학급에서 워낙 조용한 친구라 그 친구의 아픔은 다른 학생들에게 별로 영향을 끼치는 것 같지도 않았다. 나는 결국 개인적인 애도를 전하지도 못했고 다 함께 같은 반 친구의 슬픔을 나눠가지는 시간을 주지도 못했다. 나는 일개 초보 교사일 뿐이고, 세련된 방식으로 집단적 애도를 전하는 방법은 배우지 못했다. 그냥, 이 시간은 교과 수업 진도를 나가야 하는 시간이니까, 학생들도 나도 당연하게 수업에 임했을 뿐이다.


그러나 수업이 끝난 후 교무실로 돌아와서도 이런 방식이 과연 인간적인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우리 모두가 공공연하게 서로의 슬픔을 바쁨으로 덮어버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를 둘러싼 시스템이 재깍재깍 소리를 내며 재촉하고 있으므로, 시스템에서 낙오되지 않기 위해 무조건 앞만 보며 달려가는 기계 속 부품이 된 기분이었다.


개개인의 일상에 그 어떤 폭풍이 몰아쳐와도 우리는 그것을 꿋꿋하게 버텨내고 일상으로 복귀해야 한다. 일상의 상처에 자꾸 머물러 있으면 '멘탈이 약하다, 감정에 휩쓸리지 마라, 누구나 겪는 일이다'라는 식의 조언을 받게 된다. 그러나 세상에는 아픔을 3일 만에 잊는 사람도 있고 평생을 가슴에 묻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부모님이 돌아가셨는데 3일 만에 일상으로 복귀하는 사람은 회복탄력성이 좋은 사람인가, 속으로 마음이 썩어들어가고 있는 사람인가?




내가 학교를 비롯한 조직 생활에서 가장 힘든 점은 바로 이렇게 아주 사소한 장면들에서 나타난다. 단체 생활에서 경시하게 되는 개인의 작은 감정의 동요들.


다가오는 AI 시대, 인공지능 로봇을 비롯한 기계들과 구별되는 인간만의 고유한 특징으로 '감정'을 꼽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우리 한국 사회는 이런 개개인의 섬세한 감정을 '약해빠진 것이나 사치스러운 것'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수많은 범죄자나 사이코패스에게 없는 것 또한 바로 '감정'이 아닌가? 다른 사람의 감정에 공감하여 역지사지하지 못하고 사람을 도구로만 이용하는 사람들. 이렇게 감정이 메마른 인간을 만들어 낸 것은 결국 비정한 현대 산업사회 시스템과 그 시스템의 존속을 가능하게 하는 집단적 학교교육이 아니었나 싶다.


물론 학교에서도 학생들의 정서를 개발하기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들과 예체능 교과 등을 운영하고 있지만,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 기계적인 학교 시스템에 아무리 '감정'이라는 교육과정을 끼워 넣어봤자 '형식적인 교육'에 그치고 만다는 점이다. 당장 나 자신의 슬픔과 아픔을 돌보지도 못하게끔 촘촘히 짜인 기계적인 시간표 속에, 내 앞에 있는 친구의 슬픈 눈빛을 알아채고 다독여 줄 수 있는 '여유'가 우리에게 진정 있는 것인가?

누군가는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틀 속에서 '일상의 위대함'을 발견하기도 한다지만 나는 아픔에 민감한 교사이다. 젤리 귀신을 보는 '보건교사 안은영'도 아니고, 남들은 신경도 쓰지 않는 아픔이 나는 자꾸 눈에 보인다.

코로나 19라는 바이러스가 사람들을 격리시킴에 따라 우리는 최소한의 공동체 안에 머무르고 있는데, 나는 항상 생각해왔다. 정보화 시대의 학교나 직장은 앞으로 더 소규모가 되어야 한다고. 서로의 존재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불필요한 만남은 '원격'으로 최소화하고, 정말 필요한 만남은 소규모로 진행하여 당장 내 눈앞에 있는 '사람'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시대가 와야 한다고. 당장 내 눈앞의 학생, 내 눈앞의 동료, 같이 사는 식구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혹시 아프거나 힘든 점은 없는지 서로의 안부를 묻고, 자신의 안부에 대해 길게 이야기를 나눠도 서로 급할 것이 없는 그런 소규모의 느린 공동체 말이다.


대규모의 숨가쁜 만남에 치여 바쁘게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 우리는 서로의 안부가 얼마쯤 궁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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