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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mf Aug 19. 2020

영화 '버닝'을 보고



등짝이 그나마 시원하라고 입은 반팔 티셔츠와 찰싹 붙었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하는 무더웠던 어젯밤, 나는 영화 '버닝(2018)'을 봤다. 


보고 나니 에어컨 덕분인지는 몰라도 끈끈이처럼 붙었던 내 등짝과 티셔츠는 어느새 떨어져 있었다. 

중간에 에어컨을 끈 것을 감안하면 에어컨 탓 만은 아닐 거다.


영화는 여러모로 서늘함과 동시에 뜨거웠다. 20-30대 청춘의 꿈, 사랑, 현실을 우물과 고양이, 비닐하우스 등의 여러 가지의 상징적인 오브제로 담아낸 이 영화는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두며 그 자체로 타올라 사라지는 '버닝' 그 자체였다. 


분명히 타오르는 그 불꽃 자체를 보긴 봤는데, 다 보고 나니 연기만 자욱했던... 후에는 연기마저 사라져 희미하게 남아있는 불꽃의 내음만 느낄 수 있었다. 


해미(전종서)는 결핍이 많은 사람이다. 종수(유아인)이 학창 시절 자신에게 못생겼다고 한 것을 기억하고 있었으며, 그것 때문인지는 몰라도 카드빚을 지면서까지 성형수술을 한다. 또한, 해미의 집에는 주워온 고양이가 있었는데 그 고양이의 실체는 보이지 않는다. 밥통은 비워지고 고양이의 배설물은 있지만 그 실체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는 해미가 팬터마임을 배우며 "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없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거야"라고 말한 장면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해미와 관련된 장면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장면은 해미(전종서)가 종수(유아인)네 시골집에서 상체의 옷을 다 벗고  '그레이트 헝거'의 춤을 추는 장면이었다. '리틀 헝거'는 육체적으로 굶주린 배고픈 사람이고 '그레이트 헝거'는 '삶의 의미'를 항상 추구하는 정신적인 측면에서 배고픈 사람인데, 아프리카의 타오르는 노을처럼 사라져 버리고 싶다고 한 해미가 석양 아래에서 옷을 벗어던지고 추는 '그레이트 헝거'의 춤은 아름다우면서 슬펐고 쓸쓸했다. 마치 현실에서 노을처럼 사라져 버리고 싶은, 자신을 얽매는 현실에서 벗어나 자유와 이상을 찾는 하나의 몸짓이자 의식 같았다.  그렇게 해미는 '리틀 헝거'이자 '그레이트 헝거' 둘 다 였다. 




한편, 종수(유아인)는 내 기준 가장 순수한 캐릭터였다. 일용직 일을 하며 소설가의 꿈을 꾸던 종수는 우연히 만나게 된 초등학교 동창 해미와의 한 번의 성관계를 통해 해미에게 빠졌으며 해미 곁에 벤(스티븐 연)이 있었음에도 해미에게 끌려다녔다. 그러던 중, 갑작스레 해미와 연락이 안 되게 되었다.  종수는 여러 가지 의심되는 부분(화장대의 립스틱들, 벤이 모아놓은 여러 가지 여자 장신구들 중 해미가 실종되고 해미의 시계가 있었던 점 등)을 통해 벤이 해미를 죽였을 거라 짐작한다. 하지만 종수는 벤의 앞에 나서지 못하고 계속 뒤에서 미행하거나 슬쩍 떠보기 밖에 못한다. 아마도 짐작컨데, 여기에는 부유한 벤에 대한 종수의 열등감, 그 사회적 갭에서 오는 창피함, 넘을 수 없는 현실의 벽에서 느껴지는 두려움이 컸을 것 같다. 


결국 종수의 마음속에서 커져간 벤에 대한 분노는 종수가 쓴 소설이던, 진짜이든 간에 표출된다. 종수는 영화의 마지막에서 벤을 칼로 찌르고 그가 타던 포르셰에 벤과 종수가 입고 있던 옷가지를 다 벗어 불태워버린 것이다. 그렇게 타오르는 불꽃을 뒤로하고 나체로 걸어가 유유히 트럭을 몰고 가는 종수의 눈은 공허했다. 그 비어버린 눈에는 해미에 대한 애정과 미안함, 부유한 벤에 대한 분노와 열등감, 아버지에 대한 창피함, 어머니를 향한 비어버린 갈증을 불꽃에 모두 비워낸, 하지만 곧 다시 다른 것들로 채워질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또 다른 인물 벤(스티븐 연)은 물질적으로는 풍족했지만, 마음은 비어있던 캐릭터였다. 그는 많은 사람들과의 파티 속에서도 충족감, 만족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는 종수에게 자기는 정기적으로 쓸모없는 비닐하우스를 태운다고 얘기하는데, 아마도 그 자신이 쓸모없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태워 없애는 행위를 통해 만족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만약 해미가 비닐하우스의 메타포가 맞다면, 벤이 해미를 죽인 것은 확실하다. 해미는 그렇게 벤에게 가족도, 친구도 없는 외로운 길고양이이자 가볍고 잘 타는 그다지 쓸모없는 비닐하우스였던 것이다. 벤은 그렇게 외롭고 결핍된 것들, 현실적으로 허덕이는 사람들,  그리고 스스로도 그 자체로 사라져 버리고 싶은 존재들을 가까이함으로써 자신이 상대적으로 충족된 사람이라는 것을 상기시키는 듯했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잠깐이라도 충족감과 우월감을 느낀 것 같았다. "그래 이런 애들도 있는데.. 나는 너희와 달라" 이런 느낌이랄까. 하지만 그렇게 비닐하우스를 태울수록 점점 더 그의 마음은 더 공허해진다. 그는 '리틀 헝거'도 , '그레이트 헝거' 도 아니다. 삶 자체에 배고픔이 없던, 아니 배고픔을 느끼지 못하는 캐릭터였다. 




나는 우리 모두가  '그레이트 헝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늘 삶의 의미를 묻고 충족감과 만족감을 쫒는다. 하지만, 무언가 채워지고 나면 우리는 진정으로 행복할까? 삶의 의미를 찾게 되면 행복할까? 행복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일시적이다. 우리는 다시 다른 충족감을 원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갈구하고 묻고 원한다. 그게 무엇이든지 간에. 

우리는 언제나 배고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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