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amf Nov 14. 2021

영화 ‘파이트 클럽’을 보고


자동차 리콜 심사관인 주인공 남자는 부족함 없이 살고 있었다. 하지만 항상 좋은 브랜드의 물건으로 둘러싸인 그는 무언가 공허했다. 그래서 결핵환자나 고환암 모임 등 몸이나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 모이는 각종 모임에 가서 사람들과 얘기하고 안아주고 안기면서 위안을 얻었다. 거기에서 매우 불안해 보이는 말라라는 여성을 만나기도 한다.


그는 출장이 잦았고, 모든 것이 일회용인 기내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두고 일회용 친구라 생각했다. 그리고 여느 날과 같이 기내에서 타일러 더든(브래드 피트)을 만난 날, 주인공의 집은 화재가 나 모든 것이 불타버렸다.


그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더든에게서 받은 전화번호가 생각났고,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집이라 하기 어려울 정도로 황폐한 공간에서 둘은 같이 지내게 된다. 그들은 싸움을 통해 그들 마음속에 있는 무언가를 하나둘씩 해방시키는 느낌이 들었고, 정기적으로 싸웠다. 어느새 그들 주위로 그들을 구경하러 차차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그들 역시 서로 싸우며 ‘파이트 클럽’이 형성되었다.


이 ‘파이트 클럽’ 은 단순히 서로 싸울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로 물들어버린 사회와 싸우고자 했다. 그들은 은행의 ATM기를 폭파시키고 프랜차이즈 커피숍을 파괴하고 공공 설치물을 훼손시키는 등의 행동을 하며 그들이 처한 사회에 대한 불만을 표했다. 그리고 주인공과 브래드 피트는  그 모든 일의 주동자들이었다.


하지만 점차 더든이 주인공보다 더한 힘을 가진 듯 행사했고, 그는 그에 불만을 가졌지만, 어느새 더든이 주인공보다 막강한 힘을 행사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카드회사를 비롯한 자본주의와 관련된 건물들을 폭파시키고자 한다.


그러던 중, 주인공은 그와 같이 모든 일을 벌인 더든이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렇다. 더든은 주인공이 만들어낸 무의식의 산물이자 환각이었던 것이다.


주인공은 자본주의에 물들어있었으며 그러한 자본주의의 산물, 즉 브랜드 상품이 곧 자기 자신이라 생각할 정도로 그 사회에 녹아있었다. 아마도 그런 자기 자신에 대해 무의식적으로 환멸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었을 거라 생각된다. 즉, 누구보다 그를 즐기면서도 그것에 환멸을 느끼는 양가적 태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현실에 점차 지쳐가며 환각, 즉 타일러 더든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 영화를 보고 많은 생각이 들었다.

첫째로, 내 안에도 타일러 더든이 있다는 것. 

둘째로, 내 안에는 타일러 더든 말고도 다른 무수한 인물들이 있다는 것.

셋째로, 나는 그것을 누른 채 살아가는데, 가끔 불쑥불쑥 튀어나온다는 것. 


사실, 나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나 자기 자신 안에는 다른 누군가가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는 그것을 시각적으로 표현해야 하기에 사람으로 등장시켰지만, 사실 그 인물은 생각이다. 즉, 우리는 겉으로는, 말로는 '이렇다' 고 표현하지만 속으로는 '그렇지 않다.'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매우 잦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본심, 본 생각을 감추고 거짓을 말하는 경우가 많다.


아마도 그렇게 표면으로 드러나는 거짓에 자기 스스로가 환멸을 느끼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그 양심의 가책을 덜어낸다. 일기나 글쓰기, 격렬한 운동, 그림 그리기 등 다양한 취미생활들로 자신들과의 싸움에서 오는 지침과 불편을 승화시키는 것은 아닐까.


영화 파이트 클럽 속 솔직하고 원초적이며 거리낌 없는 타일러 더든이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아마 우리들이 현실 속에서 그와 같이 살아가기가 매우 힘들다는 것을 알기에, 하지만 누구나 자신의 마음속 더든이 숨 쉬고 있음을 자각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작가의 이전글 사진을 찍는다는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